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곁에 남은 남자 — 『에반게리온』 후유츠키 코조

곁에 남은 남자 — 『에반게리온』 후유츠키 코조

· 최장혁· 후유츠키 코조
목차

휴일 오후에 아이들과 장기판을 꺼내는 일이 가끔 있다. 아이들은 규칙을 반쯤만 알아서 판은 늘 중반쯤에서 흐지부지되지만, 나는 되도록 끝까지 두는 편이다. 승부 때문이 아니다. 외통이 보이고 난 뒤에도 판 위에 남아 있는 수순 —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는 쪽이 그래도 두는 몇 수 — 가 어떤 사람의 전부를 설명할 때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에반게리온』에서 그 몇 수를 가장 오래 둔 사람은 조종석의 아이들이 아니다. 사령부 이인자석, 늘 한 계단 위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노인. 후유츠키 코조다. 신극장판 Q에서 그는 신지를 불러 앉히고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통보한다. 서른한 수 뒤에 자네가 진다고. 잔인한 선고처럼 들리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다른 것을 본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에게 십수 년째 해온 말이기도 하다는 것. 그는 이길 수 없는 판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뒤에도, 판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다.

겨냥하지 않은 사랑 — 프로이트

원작은 후유츠키가 이카리 유이를 사랑했다고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교토 시절 그녀의 지도교수였다는 것, 결혼 소식을 듣던 날의 표정,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나도록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유이 군"에서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 그게 전부다. 프로이트라면 이 전부-아닌-전부를 뭐라고 불렀을까. 표준판 열여덟 권에서 그는 이상한 관찰 하나를 적어둔다. 사람 사이에 가장 오래가는 결속을 만드는 것은 정작 겨냥이 억제된 충동이라고. 이유는 간단하다.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겨냥된 사랑은 도달하는 순간부터 닳기 시작하는데, 겨냥한 적 없는 사랑은 닳을 계기 자체가 없다. 고백된 적도, 거절된 적도 없는 감정은 종결의 형식을 갖지 못한다. 후유츠키의 삼십 년은 순정이라기보다 이 역학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다른 글에서 ‘침해당하는 제3자’가 있어야만 사랑이 점화되는 남자들을 유형화한 적이 있다. 이미 다른 남자에게 속한 여자에게만 불이 붙는 유형. 후유츠키는 그 삼각형의 반대 꼭짓점에 서 있다. 그가 침해당한 제3자다. 프로이트는 빼앗는 쪽의 심리를 썼지, 밀려난 쪽이 그 사랑을 어디에 보관하는지는 쓰지 않았다. 후유츠키가 그 보관법을 보여준다. 대상이 사라진 자리 곁에 취직하는 것. 유이가 사라진 뒤 그녀의 흔적은 전부 한 남자의 수중에 있었다. 초호기가, 레이가, 신지가, 시나리오 전체가. 그래서 그는 애도를 끝내고 마음을 회수하는 대신 — 프로이트가 애도의 정상적인 종착이라 부른 그 회수 대신 — 흔적들 곁의 부관석에 앉았다. 겐도의 옆이 세상에서 유이와 가장 가까운 자리였으므로.

프로이트에게는 이런 일화도 있다. 전쟁 직전 어느 여름, 그는 아름다움이 언젠가 사라진다는 이유로 눈앞의 풍경을 즐기지 못하는 젊은 시인과 산책을 했다. 덧없음이 가치를 깎는가. 프로이트의 답은 반대였다. 하룻밤만 피는 꽃이 그래서 덜 아름답지는 않다고. 후유츠키는 형이상학적 생물학이라는, 생명의 유한함을 정면으로 다루는 학문을 가르치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정작 자기 상실 앞에서는 시인 쪽에 섰다. 지나간 것을 지나가게 두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의 서식지를 지키는 관리인이 되는 쪽.

나타나지 않은 노인 — 융

융의 전집 아홉 번째 권에는 옛이야기 속 노인에 대한 관찰이 있다. 주인공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제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을 때, 지혜로운 노인이 나타난다. 융은 그 노인을 인격화된 사유라고 불렀다. 주인공에게 결여된 앎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는 것이라고. 『에반게리온』에는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완벽한 노인이 하나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던 사람, 조직에서 가장 많이 아는 사람, 아이의 어머니를 아이보다 오래 안 사람. 그런데 열네 살짜리가 절망의 밑바닥을 몇 번이나 지나는 동안 그 노인은 한 번도 내려오지 않는다. 한 계단 위에서 뒷짐을 진 채, 가끔 아무도 못 듣는 혼잣말로 상황의 아이러니를 정리할 뿐이다. 원형의 자리에 앉아 원형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 융이라면 그걸 뭐라고 불렀을지 모르겠다. 다만 그 직무유기가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융은 다른 곳에서, 남자의 영혼의 상은 여자가 짊어지기 마련이며 그 상이 투사되면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정서적 결속이 생긴다고 썼다. 절대적, 이라는 형용사를 아껴 쓰는 사람의 문장이라 더 무겁다. 후유츠키의 결속은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풀리지 않았다. 아니, 유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기계 안으로 들어갔고, 그 기계는 매일 그의 눈앞에 있었다. 영혼을 맡긴 사람이 물건이 되어 격납고에 서 있는 것이다. 노인이 아이에게 내려가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지혜는 이미 저당 잡혀 있었다.

흉곽이 감싸지 못한 것 — 사상심학

내 전공의 언어를 한 겹만 얹어본다. 사상심학에는 식견이라는 말이 있다. 직접 겪지 않은 것을 두루 듣고 궁리해 이치에 닿는 앎. 후유츠키는 작품 전체에서 식견의 총량이 가장 큰 사람이다. 그리고 경륜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것을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려 감싸 전하는 일. 흉곽이 가슴을 감싸듯이, 라고 옛 해설은 쓴다. 앎은 전해질 때 비로소 일이 된다. 후유츠키의 앎은 십사 년 동안 흉곽 안에만 있었다. 신지가 그 앎을 가장 필요로 하던 시기 내내. 굳이 이 언어로 말하면, 전하지 못한 식견은 안에서 자긍의 모양으로 굳는다.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되는 상태. 그가 Q에서 마침내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진실을 말했을 때, 그것은 감싸 전함이라기엔 십사 년 늦었고, 위로라기엔 외통 선언과 함께였다.

술잔 앞의 갈림길 — 이제마

그런데 그의 침묵에는 기점이 있다. 처음부터 침묵했던 게 아니다. 딱 한 번, 그는 말하러 갔다. 남극의 참사 뒤 진상을 캐고 다니던 몇 해, 그는 증거를 모아 겐도 앞에 섰다. 전부 공표하겠다고. 그날 그는 폭로 직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계 최대의 비밀 공사 현장을 내려다보며, 결국 그 조직의 이인자가 되는 쪽을 골랐다.

이제마는 『격치고』 반성잠 서문에 자신에 대해 이상할 만큼 솔직한 문장을 남겼다. 거짓된 마음이 일어나 아직 행하기 전에 돌이키는 것, 공부란 그게 전부라고. 詐心便發 未及行詐而反誠. 그리고 사람마다 술이든 색이든 재물이든 권세든, 반드시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욕심이 하나 있어 거기서 넘어진다고 덧붙였다. 후유츠키의 갈림길에 이 문장을 겹쳐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보인다. 그를 붙든 것은 넷 중 어느 것도 아니었다. 술도 재물도 권세도 아니고, 사라진 사람의 흔적이었다. 이제마가 목록에 넣지 않은 다섯 번째 아교.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서 그를 주저앉힌 것이 하필 그것이었다.

반성잠에는 힘이 전부 저쪽에 있는 자리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적은 대목이 있다. 巽이라는 괘 이름이 붙은 잠언이다. 거기 이런 문장들이 나란히 있다. 큰 바람이 헐뜯어도 미친 듯 변론하지 말라. 부에 붙은 무리와는 함께 기대지 말라. 그리고 —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 마침내 건넘이 있다. 必有忍其乃有濟. 후유츠키는 앞의 계는 완벽하게 지킨 사람이다. 십사 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미친 듯 변론하지 않았다. 문제는 두 번째다. 그는 힘 가진 무리 곁에 제 침묵을 통째로 맡겼다. 이제마의 문장에서 참음이 건넘이 되는 조건은 하나다. 궁한 사람의 셈은 궁한 사람이 홀로 셈한다 — 참되, 제 셈을 놓지 않는 것. 후유츠키의 참음에는 제 셈이 없었다. 셈은 전부 겐도의 시나리오가 했고, 그는 그 셈의 결과를 매일 결재했다. 참음의 외양과 의탁의 실질. 같은 잠언은 군자의 원망은 늘 소인에게 있다고, 원망 그 자체를 살피라고도 적는다. “이카리, 자네란 남자는"으로 시작하는 그의 혼잣말들. 십사 년 묵은, 한 번도 겐도에게 직접 던져지지 않은 그 문장들이 정확히 그 살핌의 대상이다.

이것이 그의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 접촉면에서는 저울이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다. 초호기도, 레이도, 신지도, 시나리오도, 유이의 이름이 닿는 모든 것이 겐도의 수중에 있었다. 사랑이 남을 수 있는 형태가 참음 하나뿐인 자리에서, 참음은 오래 두면 굳는다. 이제마가 본 것은 그 굳는 물성이다. 잘 참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참음이 제 셈을 잃는 순간 의탁이라는 다른 물질로 응고한다는 것.

말하지 않은 원한 — 불교

변론과 의탁 사이에 세 번째 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아함의 한 경은 수행자를 묶는 매듭들을 나열하는데, 그 목록에 이상하리만치 구체적인 항목이 하나 있다. 말하지 않는 원한. 겉으로 성내지 않고 다투지 않아도, 발설되지 않은 원한은 그 자체로 결박이라는 것이다. 열반경은 반대편의 상을 보여준다. 세상과 다투지 않고 세상 법에 물들지 않음이 우발라꽃 같다고. 후유츠키는 멀리서 보면 그 꽃을 닮았다. 작품에서 가장 다투지 않는 사람, 가장 관조적인 사람. 그러나 꽃의 요점은 다투지 않음이 아니라 물들지 않음이다. 그는 물 위에 뜬 게 아니라 물에 잠긴 채 조용했던 것이고, 그 고요는 내려놓음이 아니라 잘 관리된 결박이었다. 그 문이 잠긴 적은 없었다. 그는 그 앞을 매일 지나다녔고, 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통과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아는 것과 놓는 것 사이의 거리를 그보다 잘 보여주는 인물은 드물다.

여러 개의 청록 선이 오른쪽 문턱 앞의 차콜 세로 막대 앞에서 멈추고, 오커색 선 하나만 막대를 지나 작은 입자로 흩어지는 다이어그램

조건절만 남은 문장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에서 후유츠키는 저항 없이 풀려 사라진다. 마지막 순간 그의 앞에 유이의 상이 떠오르고, 그는 평생 쓰던 호칭 그대로 그녀를 부르며 흩어진다. 유이 군. 나는 그 장면을 구원으로 읽지 않는다. 돌이킴은 행하기 전에만 돌이킴이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서의 발화는 돌이킴이 아니라, 평생 겨냥을 억제당한 말이 마침내,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다. 겨냥 없는 사랑은 닳지 않는다는 프로이트의 관찰은 끝까지 유효했다. 닳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입자가 되어서도 그 이름이 남아 있었다.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 마침내 건넘이 있다. 후유츠키의 생은 이 문장의 조건절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음은 넘치게 있었다. 건넘은 오지 않았다. 그의 참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 참음이 누구의 셈 위에서 이루어지는가를 그 자리가 처음부터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고 나면 이인자석의 노인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냉소적인 방관자가 아니라, 이길 수 없는 판에서 자기 몫의 몇 수를 사십 년 동안 두고 있던 사람.

휴일의 장기판으로 돌아간다. 외통이 보인 뒤에 두는 수는 승부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끝까지 두는 이유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지는 자리를 지키는 것과 지는 쪽에 기대는 것은 겉보기에 같은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 한 끗을 가르는 것이 제 셈의 유무라는 걸, 나는 이 노인을 오래 들여다보고서야 문장으로 만들 수 있었다. 판을 접는데 아이가 묻는다. 아빠, 졌는데 왜 웃어. 글쎄. 끝까지 두었으니까, 라고만 해두었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