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나 없이 세워진 여자 — 『에반게리온』 아야나미 레이

나 없이 세워진 여자 — 『에반게리온』 아야나미 레이

· 최장혁· 아야나미 레이
목차

같은 얼굴이 수조 안에 줄지어 떠 있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무섭다기보다 어떤 오래된 그림이 떠올랐다. 하나가 깨지면 다음이 깨어난다. 깨어난 쪽은 앞의 것을 기억한다 — 이름도, 자리도, 해야 할 일도 그대로 이어받는다. 몸은 갈렸는데 무언가는 끊기지 않고 다음 몸으로 건너간다.

불교에서는 이걸 윤회라 부른다. 죽는 것은 몸이고, 건너가는 것은 식(識)에 쌓인 종자(種子)다. 다음 생의 몸은 새것이지만, 그 안에 흘러든 흐름은 앞 생의 것이다. 아야나미 레이를 보며 나는 이 인물이 그 그림의 SF판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흔히 레이를 텅 빈 소녀, 모든 것에 초연한 소녀로 읽는다. 어딘가 해탈한 사람처럼.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본다. 그녀는 비어서 자유로운 게 아니라, 비어 있는 채로 끊기지 못해 갇혀 있는 쪽에 가깝다. 무엇이 비어 있고 무엇이 갇혀 있는지를 말하려면, 먼저 사람이 ‘나’를 갖는다는 게 무슨 일인지부터 봐야 한다.

我 없이 선 국 — 이제마

이제마는 사람이 선다는 것을 「我身立局」 넉 자로 적는다(『격치고』 四戒). 내 몸이 국(局)을 세운다. 여기서 국이란 한 사람이 한 사람으로 굳어 선 꼴이다 — 폐가 크고 간이 작은 식으로, 저마다 다르게 빚어진 한 덩이의 됨됨이. 그런데 이 구절은 혼자 있지 않다. 바로 곁에 같은 꼴의 문장이 줄지어 선다. 我家着地, 我身立局, 我心渾衆, 我事係天. 집도, 몸도, 마음도, 일도, 전부 앞에 ‘나(我)‘가 붙는다. 이제마에게 산다는 것은 이 네 가지를 ‘내가’ 하는 일이다.

이 넷은 그냥 나열이 아니다. 이제마는 자리까지 짚는다. 「我止在地 地有家也, 我行在我 我有身也, 我遇在人 人有心也, 我決在天 天有事也」(四戒). 그중 몸(身)은 ‘我行在我’ — 내가 행하는 것이 나에게 있고, 그래서 내가 몸을 가진다 — 의 자리다. 몸이란 我가 행위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행위가 我에 있어야 그 몸이 비로소 내 몸이 된다.

그는 다른 데서 더 분명히 말한다. 「我自爲身」 — 내가 내 몸을 스스로 한다. 「我之免不肖在我也」 — 내가 못남을 면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性命論). 곁의 문장도 같은 말을 한다. 「局命汝身 汝身汝爲」 — 국이 네 몸을 명하지만, 그 몸은 네가 하는 것이다(四戒). 국을 세우는 것은 몸이지만, 그 몸을 ‘하는’ 것은 나다. 立이라는 글자 뒤에는 언제나 세우는 자, 我가 있다. 세움이란 누가 세웠느냐를 묻는 동사다.

레이를 이 구절에 대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身이 있다. 국도 있다. 그녀는 분명히 한 몸으로 서 있고, 에바를 몰고, 자리도 있다. 그런데 그 立을 한 我가 없다. 그녀의 몸은 그녀가 스스로 세운(自爲)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세워졌다. 죽은 여자의 자리를 메우려고, 어떤 거대한 것의 그릇으로 쓰려고, 바깥의 손이 그 몸을 빚어 세웠다. 같은 「我身立局」인데 능동이 아니라 피동이다 — 我가 국을 세운 게 아니라, 我 없이 국이 세워졌다. 한 글자의 태(態)가 뒤집힌 자리에 이 인물의 전부가 들어 있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레이에게 국이 없는 게 아니다. 태어난 국이든 만들어진 국이든, 국은 국이다. 폐가 크고 간이 작게 태어난 몸이 하나의 국이듯, 수조에서 빚어진 몸도 하나의 국이다. 국이라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그녀를 ‘국이 없는 존재’로 읽으면 틀린다. 그녀는 국이 없는 게 아니라, 그 국을 자기 것으로 ‘하는’ 我가 없는 국이다. 身도 있고 국도 있는데, 아(我)가 없다. 빈 것은 국이 아니라, 그 한가운데 들어서야 할 주어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이제마가 사람의 길로 내건 反誠 — 굳으려는 찰나에 방향을 제 손으로 되돌리는 일 — 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되돌릴 손에 아직 힘이 실리지 않았으니까. 굳지도 풀지도 못한 채다. 그녀는 굳은 사람도 푼 사람도 아니라, 그 일을 할 주체가 아직 또렷이 서지 않은 국이다. 이제마가 평생 박으라 한 그 닻(我)이, 그녀에게는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떠 있다. 그리고 그 닻이 채 박히지 않은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작품은 동양의 또 다른 전통으로 정확히 그려 보인다.

희미하게 켜진 불 — 불교

我가 비어 보이는 자리 — 불교는 이것을 무아(無我)라 부른다. 다만 조심해야 한다. 무아라고 하면 흔히 해탈을, 나를 비워 자유로워진 경지를 떠올린다. 레이의 무아는 그쪽과 거의 반대편에 있다.

불교가 마음을 들여다본 방식을 빌리면 그 갈림이 보인다. ‘나’라는 느낌은 어느 깊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일어난다. 마음 깊은 곳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창고에 한 생의 경험이 종자(種子)로 쌓이고, 그 창고를 ‘나’라고 움켜쥐는 손 — 말나식(末那識) — 이 한순간도 놓지 않고 그것을 ‘나’라 부른다. 사람에게 ‘나’라는 불은 늘 켜져 있는 셈이다. 다만 그 불이 얼마나 밝은지, 그 손이 얼마나 단단히 쥐는지는 한결같지 않다. 緣이 닿는 만큼 밝아지고 단단해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 — ‘나’라는 불의 밝기도 緣을 따라 오르내린다.

태어난 사람은 태어남이라는 緣으로 그 불이 환히 켜진다. 제 몸으로 세상에 나오는 그 사건이, 쥐는 손에 처음으로 힘을 준다. 그래서 누구나 태어나며 ‘나’를 단단히 쥐고, 살자고 하고, 내 것을 챙긴다. 그 움켜쥠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게 켜져 있다는 것조차 잊는다.

레이는 태어난 게 아니라 만들어졌다. 죽은 여자의 자리를 메우려고, 어떤 거대한 것의 그릇으로 쓰려고 빚어졌다. 그러니 ‘나’를 쥐는 손은 그녀에게도 있되, 태어남이 줬어야 할 그 힘을 받지 못한 채로 나왔다. 불은 켜져 있지만 흐릿하고, 손은 있지만 헐겁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한 몸이 깨지면 수조의 다음 몸이 깨어나 앞의 기억과 자리를 그대로 이어 켠다 — 작품이 수조와 복제로 눈앞에 펼쳐 보이는 그 그림이다. 기억은 대를 이어 옮겨붙는데, 정작 그것을 ‘나’라고 단단히 쥐는 힘만은 어느 몸에서도 차오르지 않는다. 그녀가 죽으라면 죽겠다 답하고 제 교체에 동요하지 않는 건, 달관해서가 아니라 그 쥠이 너무 헐거워서다.

그리고 작품은 그 흐릿한 불을 무엇이 밝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레이 자신이 아니다. 신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가 곁에 와 웃으라 하자 그녀는 어떻게 웃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처음 웃고, 그의 깨진 안경을 쥐자 가슴께가 따뜻해진다고, 그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평소 흐릿하던 불이 타자가 닿을 때 깜빡 밝아진다. 이제마의 말로 옮기면 — 그녀의 立은 제 안에서 힘을 못 내고, 다른 국이 와서 일으켜야 비로소 또렷해진다. 我身立局의 그 불을 밝히는 손이 자기 안이 아니라 바깥, 타자와의 마주침에 놓인 것이다.

여기서 해탈과의 갈림이 또렷해진다. 깨달아 ‘나’를 벗은 자도 그 불을 끈다. 그러나 그쪽은 환히 타던 불을 닦고 닦아 스스로 끈 것이다 — 끄는 데 평생이 든다. 레이의 불은 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흐릿하다. 한쪽은 밝던 것을 의지로 줄여 갔고, 한쪽은 또렷이 타오른 적이 없다. 같은 어스름인데 하나는 도달한 것이고 하나는 아직 차오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무아는 끝에 이른 무아가 아니라, 아직 밝아지지 않은 무아 — 발생 이전의 흐릿함이다.

그런데 한 가지를 빠뜨리면 안 된다. 이 무아는 작품이 내미는 정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틀렸다 내치는 것도 아니다. 작품은 그것을 끝까지 유혹으로, 또 해답일 수도 있는 후보로 들고 가다 마지막에 고르지 않는다. 이제마가 사람의 길로 박은 것은 무아가 아니라 거꾸로 ‘我를 밝히는 것’이었다 — 불을 밝혀 흐름에 휩쓸리지 않되, 그 불을 한 방향으로만 굳히지도 않는 것(反誠). 레이는 그 곁, ‘나’라는 불이 아직 흐린 자리에 맨 처음으로 놓인 인물이다. 작품은 그 흐릿함을 맨 앞에 두고, 끝에 가서도 끝내 한쪽으로 닫지 않는다.

비운 한가운데, 모이고 갈라지는 선들
가운데를 비워 둔 자리에서, 한쪽은 모이고 한쪽은 갈라진다.

시작이 곧 끝

이 자리에서 보면, 레이가 왜 이 작품의 맨 앞에 서야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 끝에는 인류보완계획이 있다. 모든 사람의 막 — 나와 남을 가르는 경계 — 이 녹아, 모든 국이 무너지고 하나로 섞이는 장면. 더는 너도 나도 없는 거대한 하나. 그것이 무엇인가. 모든 ‘나’의 불이 일제히 꺼진 무아다. 끝이 무아라면, 시작도 무아다. 레이는 끝에서 모두가 닿을 그 무아를, 맨 앞에서 한 사람의 몸으로 미리 살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그 결이 다르다 — 끝은 환히 타던 불이 다 같이 꺼지는 것이고, 시작은 아직 밝지 않은 불 하나가 흐릿이 떠 있는 것이다. 꺼진 무아(보완계획)와 아직 밝지 않은 무아(레이)가, 같은 그림의 두 판본으로 마주 선다.

그래서 작품은 이 무아를 두 번 들이민다. 한 번은 레이로 조용히, 한 번은 보완계획으로 거대하게. 그것은 줄곧 유혹이고, 때로 해답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끝에 가서 신지는 그것을 고르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로 녹은 자리에서 그는 메스껍다는 한마디를 뱉고, 녹아버린 막을 다시 세운다. 따가워도 너와 내가 갈린 채로 있겠다는 선택. 그것이 이제마가 사람의 길이라 한 反誠 — 닻(我)을 다시 박되 한 방향으로 굳히지는 않는 것 — 의 모습이다. 무아는 여기서 틀렸다고 부서지는 게 아니다. 끝까지 갈 수 있었던 길로 남되, 다만 선택되지 않을 뿐이다. 레이는 그 갈림의 첫 페이지다.

작품은 그 무아를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는다. 레이가 맨 앞에서 아직 밝지 않은 불로 그것을 보여준다면, 뒤에 오는 카오루는 그 무아를 끝까지 밀어 완성된 해답으로 내민다 — 모든 막을 녹여 너와 나를 지우는 것이 사랑이라고. 레이가 무아의 시작이라면 카오루는 무아의 끝이다. 둘 다 같은 길의 두 끝이고, 둘 다 끝에 가서 선택되지 않는다. 길을 정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녹은 자리에서 메스꺼움을 느끼고 막을 도로 세우는 쪽이다.

그러면 레이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서 작품은 단정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끝 무렵, 줄곧 누군가의 그릇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제 쪽에서 무언가를 한다. 한 복제체가 신지를 지키려 제 몸을 던지고, 마지막에 그녀는 거대한 계획 앞에서 당신과 함께 있는 건 싫다고 말한다. 줄곧 흐릿하던 불이, 처음으로 제 힘으로 차오른다. 늘 바닥에 닿을 듯 떠 있던 닻이, 처음으로 제 무게로 가라앉으려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그 불이 끝까지 환히 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이 채 밝아지기 전에, 막 차오르던 그 찰나에 사라진다. 처음 일어난 그 자발(自發)이 한 사람의 我로 끝까지 여물었을지 — 작품은 닫지 않고 열어 둔다. 그리고 바로 그 미결이 이 인물을 두 방향으로 동시에 걸어 둔다. 한쪽으로는 신지가 끝에 가서 세울 反誠 — 我를 제 힘으로 박는 일 — 의 예고로, 다른 한쪽으로는 보완계획의 무아 — 모두의 불이 함께 꺼지는 일 — 의 예고로. 막 차오른 그 불이 끝까지 밝아졌다면 그녀는 신지 쪽으로, 끝내 흐린 채 남았다면 보완계획 쪽으로 기운다. 작품은 어느 쪽도 닫지 않음으로써 둘 다를 품는다.

옛 그림 이론에 홍운탁월(烘雲托月)이라는 말이 있다. 달을 그리려면 달을 그리지 말고 그 둘레의 구름을 칠하라는 것. 안 그린 자리에서 달이 떠오른다. 레이의 마지막이 그렇다. 그 불이 끝까지 밝아졌는지를 그리지 않았기에, 그 我는 오히려 더 또렷한 가능성으로 남는다. 다 그렸다면 멈췄을 것이, 안 그렸기에 흐른다. 시작에 놓인 그 흐릿한 자리가, 작품 전체가 끝내 묻고 답할 단 하나의 물음을 — ‘나’를 세울 것인가 풀 것인가를 — 처음으로, 그러나 닫지 않은 채로, 우리 앞에 내려놓는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