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어머니를 대신 산 여자 — 『에반게리온』 아카기 리츠코

어머니를 대신 산 여자 — 『에반게리온』 아카기 리츠코

· 최장혁· 아카기 리츠코
목차

가끔 내 목소리에서 내 것이 아닌 문장이 튀어나온다. 누군가에게 무심코 한마디 하고 나서, 아차 싶다. 어조도, 말끝을 꾹 누르는 버릇도, 어릴 적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던 사람의 것이다. 거울에서 문득 부모의 얼굴이 겹쳐 보일 때가 있는데, 방금 그건 그 청각판인 셈이다. 그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꽤 애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사람의 말투로 살고 있었다.

거울에 부모가 겹쳐 보이는 것까지는 누구나 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어떤 사람은 그 겹침을 보고 반 발 물러서고, 어떤 사람은 그 겹친 얼굴을 자기 얼굴로 삼아 평생을 산다. 직업도, 사랑도, 죽는 방식까지 어머니의 것을 통째로 살아버린 여자가 있다. 『에반게리온』의 아카기 리츠코다. 그런데 그녀를 두고 흔히 하는 말—어머니의 운명을 물려받았다—이 어디까지 맞는 말인지, 나는 오래 걸렸다. 물려받은 것과 떠안은 것은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물려받은 자리, 그러나

먼저 분명히 해 둘 게 있다. 리츠코가 선 자리는 그녀가 고른 게 아니다. 어머니 나오코가 사랑한 남자 겐도가 있고, 어머니가 만든 시스템 마기가 있고, 네르프라는 조직이 있다. 어머니의 식견이 모아 둔 그 한가운데로 딸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반응했듯 딸에게 반응했고, 그 자리는 어머니에게 줬던 역할을 딸에게 똑같이 배정했다. 이용당하고, 신뢰받는 척 쓰이고, 끝내 폐기되는 역할. 리츠코가 아무리 영리해도 그 자리에 선 이상 그 역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 그녀가 어머니의 기계에 최후의 명령을 내릴 때 마기가 딸이 아니라 겐도의 편을 드는 것—그게 그 자리의 닫힘이다.

이제마라면 그 자리를 먼저 봤을 것이다. 『격치고』에서 그는 사람의 일이 마음에서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식견을 가지면 사람이 반드시 모인다(我有識見 人必歸我). 그런데 그는 거기에 한 구절을 더 붙인다. 식견이 있어도 안에 믿음의 중심이 없으면(雖有識見 若無信心), 사람이 모인 그 자리에서 나는 반드시 속이게 된다(我必行欺)고. 자리가 역할을 떠미는 건 맞지만, 그 떠밂을 끊어 세우는 건 안쪽의 信心이다. 信心이 선 사람은 같은 자리에 서도 역할에 휩쓸리지 않고, 信心이 빈 사람은 자리의 기세대로 굴러간다.

여기서 두 가지가 갈린다. 자리는 밖에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 자리를 어떤 안쪽으로 받아내는가는 자기 것이다. 자리를 물려받는 것과, 어머니의 안쪽까지 물려받는 것은 별개다. 리츠코는 자리는 물려받았지만, 어머니의 局까지 물려받을 이유는 없었다. 信心이 섰다면 같은 자리에 서서도 “나는 어머니가 아니다"가 가능했다. 그녀의 진짜 문제는 자리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자기 안쪽이 비어 그 자리를 어머니의 얼굴로 받아낸 것이다.

그 비어 있음의 증상이 그녀의 눈이다. 이제마는 마음이 한쪽으로 굳으면 그 굳음이 곧 시야가 된다고 했다. 내 정성이 다하지 못하면 남의 거짓을 다 알기 어렵다(己誠未盡則人僞難悉)—탁해진 눈은 자기부터 못 본다. 모든 걸 읽는 여자가, 마기의 구조도 더미 플러그의 원리도 그녀만큼 읽은 사람이 없는데, 단 하나 자기가 앉은 의자만은 못 읽었다. 그녀의 눈은 세상을 또렷이 읽고 자기만은 어머니의 메아리로 읽었다. 의지가 아니라 광학이다. 거울이 어머니의 얼굴만 비추도록 굳어 있었다. 자리는 밖에서 왔지만, 그 거울은 그녀 안쪽이 빈 자리에서 굳은 것이다.

局이 서지 못한 자리

그러면 왜 그 안쪽이 서지 못했나. 그 비어 있음의 내력은 프로이트와 융의 자리다.

프로이트라면 죽은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할 것이다. 잃은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가라앉아 굳는다. 「애도와 멜랑콜리」의 그 문장.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떨어졌다.” 리츠코의 자아는 어머니라는 잃은 대상이 가라앉아 굳은 침전물이다. 自我와 어머니가 분리되지 않으니, 자기 안쪽이 설 토대 자체가 없다. 그 빈자리를 어머니가 차지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처럼 겐도를 사랑하고, 어머니처럼 의심받고, 어머니처럼 버려진다.

겐도를 향한 끌림도 여기서 풀린다. 그건 자리가 배정한 게 아니다—자리는 누구를 욕망할지까지 정해 주지 않는다. 어머니를 통째로 내면화한 딸은 어머니의 욕망까지 자기 것으로 떠안는다. 어머니가 사랑한 대상을 자기가 사랑하는 것. 어머니가 끝내 받지 못한 그 사랑을 자기는 받아내겠다는 것. 어머니를 이기려는 동시에 어머니의 미완을 완성하려는 욕망이 한데 얽힌다. 이건 자리의 일이 아니라 안쪽의 일이다. 욕망의 대상은 個人에게서 나오고, 그 욕망이 굴러가 닫히는 자리만이 場의 몫이다.

융이라면 딸이 아직 어머니에게서 나오지 못했다고 말할 것이다. 어머니 콤플렉스가 사랑의 능력으로 넘치지 못할 때 그것은 어머니와의 동일시로, 딸 자신의 주도성의 마비로 간다. 그런 딸은 자기 삶을 자기가 살지 못한다. 어머니가 이미 그 삶을 앞질러 다 살아버렸기 때문이다. 융의 문장은 거의 잔혹하다. 그런 딸은 “그림자 같은 존재로, 종종 눈에 띄게 어머니에게 빨아 먹히며, 끊임없는 수혈로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한다.” 리츠코에게 이 비유는 거의 문자 그대로다. 그녀가 매일 손보는 마기는 죽은 어머니의 정신이고, 그녀의 일과는 그 정신을 계속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수혈하는 딸. 자기 局을 세우는 대신 어머니의 局을 연장하는 부속물.

프로이트와 융이 함께 짚는 건 결국 하나다. 자기 안쪽—信心이든 局이든—이 서지 못한 그 과거의 기제. 어머니를 내면화했고, 어머니에게서 個體化하지 못했다. 그래서 자리가 내려왔을 때, 빈 안쪽은 어머니의 안쪽을 그대로 복제하며 자리를 받았다. 순서가 이렇다. 안쪽이 비고(프로이트·융), 그 위로 자리가 상속되고(격치고의 場), 빈 안쪽이 어머니의 局으로 굳으며 자리를 받아낸다.

어머니의 얼굴로 받은 매 순간

프로이트와 융은 그 안쪽이 왜 비었는지를 과거에서 설명한다. 하지만 빈 안쪽이 매 순간 어떻게 어머니의 얼굴로 다시 굳는지는, 불교가 현재형으로 짚는다.

불교는 애초에 “어머니를 대신 산 여자"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업은 떼어 남에게 줄 수 없고, 부모의 업이 자식에게 옮겨지지도 않는다.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듯 오직 자기 업만이 자기를 따른다. 그러니 불교에 리츠코의 비극을 가져가면, 그건 어머니가 물려준 게 아니라 리츠코 자신이 매 순간 지은 것이 된다. 얼핏 잔인해 보이는 이 자업자득이, 자리가 아니라 안쪽에 대면 정확히 들어맞는다. 자리를 물려받은 건 그녀 책임이 아니지만, 그 자리를 어머니의 얼굴로 받아낸 매 순간은 그녀 자신의 작동이다.

그 작동의 동력은 갈애다. 자기 안쪽이 비어 있으니, 그 빈자리를 겐도의 인정으로 메우려 한다. 자기 가치를 그의 인정에서 구하려는 그 목마름이 苦의 원인이고, 그것이 매 순간 윤회의 사슬을 굴린다. 안쪽이 비어 갈애하고, 갈애하니 안쪽이 못 선다—같은 사태의 안팎이다. 어머니를 비추는 그 거울조차 밖에서 주어진 게 아니다. 화엄경은 밝은 거울에 비치는 영상이 여럿이듯 업의 본성도 그러하다고 했다. 어머니만 비추는 리츠코의 거울은, 그녀 자신의 업이 그 상을 지어 비춘 것이다.

가장 날카로운 건 마지막이다. 더미 클론 탱크를 부수며 “나도 대체품이었다"고 절망할 때, 불교는 오히려 “그렇다, 너도 저 인형도 똑같이 고유한 自性이 없다"고 답한다. 그 절망은 無我의 자각이 아니라 我執이 뒤집힌 형태다. 끝까지 “고유한 나"에 매달렸기에 “대체 가능"이 절망이 된다. 안쪽을 세운다는 건 자기만의 단단한 我를 짓는 게 아닌데—그건 도리어 我執이다—리츠코는 我執으로 빈 안쪽을 대신하려다, 그것이 깨지자 사물로 떨어진다(物化). 그녀의 局 미성립은 곧 我執이었다. 인형을 부수는 손과 나도 인형이었다는 자각이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건, 둘 다 그 我執의 끝이기 때문이다.

바깥 틀(자리) 안으로 여러 선이 한 점으로 모이고 한 선만 마지막에 갈라지는 다이어그램

돌아오지 못한 한 박자

이제마는 굳기 직전의 한 박자를 늘 말했다. 거짓으로 흐르기 직전, 매번 다른 결로 잠깐 떠오르는 돌아옴(反誠). 도달점이 아니라 매번 출발선으로 되돌아오는 미세한 운동이다. 리츠코에겐 그 한 박자가 한 번도 작동하지 않는다. 빈 안쪽이 어머니의 局으로 굳으려는 그 길목에서, 그녀는 한 번도 자기 쪽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불교가 말하는 출구도 정확히 그 길목에 있다는 것이다. 갈애를 끄는 한순간—겐도의 인정에서 자기를 구하려는 그 목마름을 놓는 찰나. 매번 어머니의 얼굴로 굳으려는 그 자리에서 갈애를 놓으면 안쪽이 자기로 돌아온다. 反誠과 갈애의 멸이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리츠코에게 면제된 그 한 박자를, 격치고는 反誠이라 부르고 불교는 갈애를 끄는 찰나라 부른다. 다만 그 길목을 지나 둘은 갈라진다. 격치고는 자리(場)를 유지한 채 안쪽을 자기로 되돌리고, 불교는 갈애를 멸해 안쪽을 짓는 일까지 넘어 자리째 비운다. 같은 데서 출발해, 하나는 자리 안에 서서 안쪽을 바로잡고, 하나는 자리와 안쪽을 함께 비운다.

이 거울은 처음이 아니다. 나는 이 작품에서 같은 어머니가 만든 또 다른 거울을 본 적이 있다. 레이. 다만 거울을 드는 손이 반대다. 레이는 유이가 자기 모습으로 빚어낸 존재—비춰진 자다. 처음부터 유이라는 틀로 만들어져, 자기 안쪽을 가져본 적이 없다. 리츠코는 거울을 드는 손이 자기 쪽이다—비추는 자다. 누구의 틀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멀쩡히 제 인생을 살 수 있었으나, 그 자리를 어머니의 상으로 채워 스스로 비웠다. 한쪽은 안쪽이 주어지지 않았고, 한쪽은 가졌어야 할 안쪽을 비웠다. 그래서 레이에게는 자업자득을 들이대기 어렵고, 리츠코에게는 들어맞는다. 같은 유이라는 그림자가, 한쪽으로는 자기를 본떠 빚은 존재를, 다른 쪽으로는 자기 어머니를 복제한 딸을 낳았다.

그러니 리츠코를 두고 어느 한쪽으로 닫으면 둘 다 거짓이 된다. 그녀가 어머니를 못 놓아 그렇게 됐다고만 하면, 자리가 떠민 무게가 지워진다. 자리가 다 했다고만 하면, 그 자리를 어머니의 얼굴로 받은 그녀 자신의 몫이 지워진다. 자리는 면책하고, 안쪽은 묻는다. 자리는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그 자리를 어머니의 얼굴로 받을지 자기 얼굴로 받을지는 그녀의 몫이었고, 그 갈림—거기서 잠깐 다른 결로 떠오르는 한 박자—이 면제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서 부모의 얼굴이 제 얼굴에 겹치는 걸 알아보는 것까지는 누구나 한다. 어려운 건 그다음, 거기서 반 발 옆으로 비켜서는 일이다. 보는 것과 비끼는 것은 끝내 다른 일이라서. 리츠코는 누구보다 또렷이 보면서도, 그 반 발을 끝내 떼지 못한 여자다. 가끔 내 목소리에서 내 것 아닌 문장이 튀어나올 때, 내가 웃고 넘길 수 있는 건 내가 그녀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 자리가 나를 그만큼 누르지 않아서—그리고 아직은, 겹친 얼굴에서 반 발 물러설 자리가 내게 남아 있어서일 것이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