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세계를 녹이려 한 남자 — 『에반게리온』 이카리 겐도

세계를 녹이려 한 남자 — 『에반게리온』 이카리 겐도

· 최장혁· 이카리 겐도
목차

진료를 하다 보면 사람이 손을 어디에 두는지를 자꾸 보게 된다. 말은 얼마든지 꾸밀 수 있어도 손은 잘 못 꾸민다. 편한 사람은 손을 아무렇게나 풀어두고, 긴장한 사람은 손을 모은다. 그중에 깍지를 껴서 입가에 붙이고 그 손 너머로만 상대를 보는 사람이 있다. 손이 얼굴의 아래 절반을 가린다. 골똘히 생각하는 자세처럼 보이지만, 오래 들여다보면 그건 생각하는 자세라기보다 닫는 자세에 가깝다. 제 입을 손으로 막고, 손가락 사이로만 세상에 한 줌의 면을 내준다.

이카리 겐도는 거의 그 자세 하나로 그려지는 사람이다. 깍지 낀 손을 입가에 대고, 안경에 반사된 빛 너머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네르프라는 거대한 조직의 사령관인데, 작품 내내 그는 같은 책상 같은 의자에서 같은 손 모양으로 앉아 있다. 표정도 거의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한 자세로 굳을 수 있나 싶을 만큼.

헤어짐의 괴로움 — 불교

손가락 사이로만 세상을 보는 그 손은, 무언가를 꼭 쥔 손이기도 하다. 무엇을 그렇게 놓지 못하는 걸까. 불교라면 이 질문에서 출발할 것이다.

불교는 사람의 괴로움을 여덟 가지로 꼽는데, 그중 하나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다. 아함경은 이걸 애별리고(愛別離苦)라 부른다 — 은애하는 이와 헤어지는 일은 세상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라고. 겐도가 선 자리가 정확히 거기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깊이 헤어진 사람이다.

그런데 불교가 들여다보는 건 헤어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헤어진 것을 붙드는 마음이다. 한 경전은, 세상이 즐거움이라 여기는 모든 것 — 사람도, 재물도, 사랑도 — 이 실은 괴로움의 씨앗이라고 한다. 여자로 인해 남자가 근심하고 울고 끝내 제 목숨까지 끊는다는 구절이 거기 나온다. 즐거움을 주던 바로 그것이, 붙들리는 순간 괴로움으로 돌아선다. 좋아서 쥐는데, 쥐는 순간부터 그것이 나를 묶는다.

겐도가 꼭 그렇다. 유이는 그의 가장 큰 기쁨이었고, 그래서 가장 큰 괴로움이 됐다. 사랑이 컸던 만큼 그 사랑이 그를 통째로 묶는다. 불교라면 여기서 한 가지 길을 가리킬 것이다. 모든 것은 머물지 않고 변해 사라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한 점을 쥔 손을 펴라고. 사라진 것을 사라진 대로 보내면 괴로움도 따라 풀린다고. 겐도는 정확히 그 반대로 한다. 변하고 사라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사라진 것을 영원으로 붙든다. 펴야 할 손을 더 단단히 쥔다. 그가 펴지 못한 그 손이, 입가의 깍지 낀 손이다.

닻을 내린 남자 — 이제마

같은 손을 이제마는 다른 자(尺)로 잰다. 불교가 그 손을 펴라 한다면, 이제마는 애초에 그 손이 왜 한자리에 못박혔는지를 본다.

이제마는 사람이 제 몸으로 제 자리를 세운다고 적었다 — 我身立局. 내가 서면서 내 자리가 생기고, 그 자리가 다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부른다(局命我能). 본래 이건 살아 움직이는 일이다. 자리는 흐르고, 그 위에 선 나도 흐른다. 어제의 자리와 오늘의 자리가 같지 않아, 사람은 매일 조금씩 다시 선다. 그런데 겐도는 그 세움을 한 점에 못박아 고정했다. 유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자기를 통째로 내려놓고, 거기서 한 발도 옮기지 않는다. 세상은 흐르는데 그 자리만은 흐르지 않는다.

앞 글에서 유이를 두고도 나는 굳음이라는 말을 썼다. 다만 유이의 굳음은 풀어서 생긴 것이었다. 제 자리를 스스로 풀어 모두의 바탕이 되고, 닫히지 않은 채 영영 남았다. 닻을 뽑아 모두에게 부은 사람. 겐도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선다. 유이가 닻을 뽑아 굳었다면, 겐도는 한 자리에 닻을 내려 굳는다. 한쪽은 너무 풀어서 돌아올 자리가 없어졌고, 다른 한쪽은 너무 박혀서 떠날 자리가 없어졌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둘 다 그 자리에서 다시는 돌아 나오지 못한다.

그 닻이 내려진 자리를 중심으로 둘레가 따라 굳는다. 이제마는 사람이 강한 힘을 쥐면 둘레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결국 자리가 그에게 그런 역할을 떠맡긴다고 했다. 겐도에게선 그게 거꾸로 간다. 굳은 그의 한 점이 거꾸로 세계 전체에 역할을 떠맡긴다. 네르프도, 사도와의 전쟁도, 그를 후원하는 더 큰 손들과의 약속조차, 끝에 가면 그 한 점에 닿기 위한 도구가 된다. 유이라는 한 점보다 진짜인 것이 그에게는 없다.

가장 깊은 자국은 두 아이에게 남는다. 그는 죽은 아내의 얼굴로 레이를 빚어 그 빈자리에 세운다. 그래서 레이를 볼 때 그는 레이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유이를 본다. 아들을 볼 때도 아들이 아니라 유이의 아들, 계획의 한 변수를 본다. 신지는 아버지의 눈에 들고 싶어 무서운 것 앞에 서고 도망쳤다 다시 돌아오기를 되풀이하지만, 굳은 눈은 끝내 그 아이를 아들로 보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일 — 아버지가 제 자식을 알아보는 일 — 이 이 사람에게는 가장 불가능한 일이 된다. 이건 그가 모질어서가 아니다. 굳은 자리에서 난 눈은 그렇게밖에 못 본다. 가장 무서운 냉정은 악의가 아니라 이런 굳은 눈에서 나온다.

보낼 수 없어서 — 프로이트

불교가 집착이라 부르고 이제마가 굳음이라 부른 그 자리를, 프로이트는 또 다른 말로 짚는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 마음이 두 갈래로 간다고 했다. 하나는 애도. 시간이 걸려도 떠난 이에게 매인 마음을 거두어 끝내 그를 보내고 다시 살아갈 자리로 돌아온다. 다른 하나는 멜랑콜리. 여기서는 그 거둠이 일어나지 않는다. 떠난 이를 보내는 대신, 제 안으로 끌어들여 한 몸으로 만든다. 대상을 잃은 일이 자기를 잃은 일로 바뀐다. 그렇게 잃은 이를 안에 들이면 정작 산 사람 쪽이 빈다. 겐도가 무언가를 바라거나 즐거워하는 보통의 살아 있음을 거의 보이지 않는 건 그래서다. 그는 유이를 품은 대신 자기를 비웠다.

겐도의 멜랑콜리에는 한 가지가 더 얹힌다. 보통의 상실에는 죽음이라는 분명한 끝이 있어, 더뎌도 언젠가는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유이는 죽어 사라진 게 아니라 초호기 안에 남아 있다 — 닿을 듯 닿지 않는 곳에. 애도할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없는 자리. 프로이트라면 잃은 적 없는 대상이라 불렀을 것이다. 현실에 부딪혀 닳고 미워지고 시들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한 대상은 영영 완벽한 채로 마음을 붙든다. 살아 있는 사람은 다투고 실망시키고 늙어가며 조금씩 놓아지는데, 유이에게선 그렇게 놓아질 기회 자체가 사라졌다. 보낼 수 있는 부재라면 멜랑콜리도 언젠가 풀리지만, 보낼 수 없는 부재 앞에서는 평생을 간다. 그리고 그 평생의 멜랑콜리가, 한 사람만의 슬픔으로 머물지 않고 세계를 삼키는 기획으로 자란다.

풀림의 얼굴을 한 굳음 — 이제마

인류보완계획. 모든 사람의 경계를 녹여 너와 나의 구분을 지우고,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되돌리는 일. 작품은 이걸 거대한 구원의 얼굴로 내민다. 외로움도 상처도 없는, 모두가 하나인 자리.

이 풀림에는 낯익은 그림자가 있다. 모든 경계를 녹여 하나가 된다는 건, 불교가 무아라 부른 자리와 멀지 않다. 나라는 막을 풀어 너와 나의 벽을 지우는 것. 앞에서 불교는 겐도에게 손을 펴라 했다. 그런데 보완계획은 바로 그 풂을 꺼내 든다 — 손을 펴는 게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녹여서. 같은 풂인데 방향이 정반대다. 불교의 풂은 나를 내려놓아 남에게 자리를 비우는데, 겐도의 풂은 세계를 녹여 오직 한 사람에게 돌아가려 한다. 놓으라는 가르침을 가져다, 놓지 않으려고 쓴다. 모두를 하나로 만들겠다는 가장 큰 풀림이, 실은 한 점에 닻을 내린 가장 단단한 굳음에서 나온다. 풀림의 얼굴을 한 굳음.

모순은 더 깊다. 그가 닿으려는 한 점은 세상에서 가장 안 녹는 자리다. 죽어서도 닿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가장 단단하게 굳은 한 점. 그런데 그는 그 점에 닿겠다고 둘레의 모든 면을 녹인다. 모든 경계가 녹아 하나가 되면, 그 한 점도 함께 녹아 사라진다. 닿으려는 바로 그 순간에 닿을 대상이 없어진다. 가장 단단한 것에 닿기 위해 모든 단단함을 없애는 일 — 그래서 보완은 이루어져도 실패다. 평생을 들인 그 길은, 끝까지 가면 그가 만나려 한 사람을 제 손으로 지우는 길이다. 그는 그걸 끝내 모른다. 보는 눈마저 그 굳음 안에서 났으니까. 그리고 안으로만 쌓인 압력은 어디선가 터진다. 세계를 통째로 녹이려는 그 거대한 시도 자체가, 한 사람 안에서 수십 년 굳어온 것이 마침내 세계의 크기로 터져 나온 그의 파열이다.

한 점으로 녹아드는 면들과 비어 있는 중심
둘레를 다 녹여 한 점으로 모았는데, 닿으려는 그 중심은 비어 있다.

한 번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

끝에서 겐도는 닿지 못한다. 신지는 아버지가 내민 하나됨을 끝내 받지 않고, 보완은 멈추고, 세계는 다시 각자의 경계를 세운 채 남는다. 모두를 녹여서라도 닿으려 한 자리에, 그는 끝내 닿지 못한 채 남는다.

이 끝을 두고 그가 악해서 벌받았다고 읽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제마라면 그렇게 읽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굳음은 죄가 아니다. 흐르던 것이 한자리에 박혀 더는 돌이키지 못하게 된 상태일 뿐이다. 같은 물이 어디에 고이느냐에 따라 샘이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듯, 마음도 어느 자리에 굳느냐가 다를 뿐 처음부터 나쁜 종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겐도의 굳음은 사랑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을 너무 깊이 사랑해서 생긴 굳음이다. 그 사랑이 끝내 풀리지 못하고 돌이 됐다. 그를 악인으로 못박으면, 그 굳음이 어떻게 빚어졌는지는 영영 보이지 않는다.

이제마는 쉰일곱에도 제 안에서 굳으려는 마음이 매번 솟는다고 적었다. 다만 그때마다 부득이 제자리로 기어 돌아왔다고 했다. 한 번에 풀리지도, 끝내 도달하지도 않는다. 거듭 굳고 거듭 돌아오는, 끝점 없는 되풀이. 굳기 직전에 슬쩍 다른 데로 빠져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자잘한 움직임을 그는 반성(反誠)이라 불렀다. 거창한 회개도 한순간의 깨달음도 아니다. 그저 매번 조금씩 돌아오는 것. 겐도에게 없던 건 정확히 그 돌아옴이다. 그는 한 번 내린 닻을 평생 단 한 번도 올리지 못한 사람이다.

그 돌아옴이 어떤 모양인지는 이 이야기의 다른 끝에서 드러난다. 겐도가 한 점에 닻을 내려 굳었다면, 그 정반대 끝에는 닻 없이 모든 것에 녹아드는 한 소년이 있다. 불교가 손을 펴라 한 그 풂을 끝까지 밀고 간 자리다. 그러나 다 녹아 사라지는 것도 답은 아니다. 굳어 깨지는 것과 녹아 사라지는 것 사이, 굳지도 녹지도 않고 매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한 발 — 그 두 극 사이에서 자꾸 도망치다 끝내 한 발을 떼는 또 한 소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겐도가 평생 못 한 그 돌아옴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굳은 아버지가 끝내 못 푼 매듭을, 흔들리던 아들이 푼다. 구원이 가장 굳은 데서가 아니라 가장 약한 데서 온다는 건, 이 이야기가 끝에 내미는 작은 반전이다.

다시 그 손을 본다. 입가에 깍지 낀 손, 손가락 사이로만 세상을 내다보는 자세. 처음엔 그게 강한 사람의 자세인 줄 알았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면, 그건 강함이 아니라 한 사람을 너무 오래 놓지 못한 자국이라는 걸 알게 된다. 손으로 입을 막은 건 세상을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손 안쪽에 한 사람을 가둬두기 위해서였다. 누구에게도 닿지 않으려는 자세가 아니라, 단 한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세.

손을 모으는 사람을 볼 때, 나는 이제 그 손이 무엇을 막고 있는지보다 그 손이 무엇을 붙들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가장 단단해 보이는 자세 안쪽에, 차마 놓지 못한 가장 무른 것이 들어 있곤 한다. 겐도의 깍지 낀 손이 꼭 그랬다. 세계를 다 녹여서라도 붙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이미 녹아 사라진 사람.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