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머무르려고 사라진 여자 — 『에반게리온』 이카리 유이

머무르려고 사라진 여자 — 『에반게리온』 이카리 유이

· 최장혁· 이카리 유이
목차

실험 영상이 하나 있다. 한 여자가 거대한 기계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몇 초 뒤 그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빈 작업복이 천천히 가라앉고, 유리 너머에서 한 남자가 그것을 본다. 사고라고 기록됐지만, 나는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사고라는 말이 자꾸 미끄러진다. 사고는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당한 얼굴이 아니었다.

이카리 유이. 신지의 어머니이고, 겐도의 아내이고, 에바 초호기를 만든 과학자다. 작품에서 그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회상 몇 장면, 사진 한 장, 그리고 저 영상. 분량으로 치면 가장 적게 나오는 인물 축에 든다. 그런데 작품 전체가 그녀를 중심으로 돈다. 겐도가 세계를 녹이려는 것도, 레이가 그녀의 얼굴로 빚어진 것도, 신지가 저 기계를 모는 것도, 끝을 따라가 보면 사라진 이 여자 한 사람에게 닿는다.

가장 적게 있으면서 가장 크게 있는 사람. 그 모순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레이를 읽을 때 내가 본 것이 아직 또렷이 서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유이는 그 반대편에 있다. 또렷이 선 사람이, 그 선 자리를 스스로 풀어 다른 것이 되었다. 그것도 가장 큰 사랑의 얼굴로. 그래서 이 사람은 먼저 불교의 눈으로 봐야 한다. 거기에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가 있다.

머무르려고 사라진 사람 — 불교

불교에는 보살이 제 몸을 던지는 이야기가 많다. 굶주린 호랑이에게 제 살을 먹이고, 진리 한 구절을 얻으려 제 가죽을 벗겨 종이로 삼는다. 『대지도론』은 이것을 내보시(內布施)라 부른다 — 「不惜身命 施諸眾生」,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중생에게 내어주는 것. 왜 그렇게까지 하는가. 『대장부론』의 한 구절이 답이 된다. 「他命即是我命」 — 다른 이의 목숨이 곧 내 목숨이라서. 보살이 제 생명을 내어주는 건 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고, 그 남의 생명이 이미 제 것이기 때문이다.

유이가 한 일이 이것이다. 콘택트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는 제 몸과 목숨을 기계에 넣었다. 아들이 그 안에서 살아갈 그릇이 되려고, 인류가 끝내 살아남을 한 척의 배가 되려고. 신지의 목숨이 곧 제 목숨이었으니까. 작품에서 가장 큰 사랑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유이를 꼽겠다. 아무도 제 몸을 내어 자식이 들어가 살 막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보살행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몸을 버린 보살은 적멸로 사라지지 않는다. 『대장부론』은 「몸과 목숨을 버려 보시하고, 다시 해탈에 들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뛰어나다(最勝)」고 한다. 원효는 「반야의 바다를 구족하되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는다(具足般若海 不住涅槃城)」고 적었다. 깨달아 고요히 꺼지는 게 아니라, 중생이 있는 생사의 한가운데에 일부러 남는 것. 유식은 이 자리에 이름을 붙였다 —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생사에도 적멸에도 머물지 않고, 오직 남을 위해 미래의 끝까지 중생을 이롭게 하며 머무는 자리다. 지장보살이 지옥이 빌 때까지 성불을 미루고 남듯이.

유이가 남은 자리도 그렇다. 그녀는 죽어 사라진 게 아니라, 초호기 안에 남았다. 더 정확히는, 모두가 그 위에 선 바탕이 됐다. 유식에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것의 씨앗을 간직하고(「此能執持諸法種子令不失」), 다른 모든 마음과 몸과 세계가 그 위에 의지하는 바탕 — 나무뿌리가 줄기의 근본이 되듯(「譬如樹根是莖等本」) 모든 것을 떠받치는 뿌리다. 그 뿌리는 가만히 받치기만 하는 게 아니다. 때가 되면 그 안의 씨앗이 싹터, 일어나는 모든 일이 거기서 돋는다. 유이는 모두를 떠받치는 바닥이자, 모든 사건이 거기서 발아하는 씨앗 창고가 된다. 쉬지 않고 흐르며 끊기지 않는 바탕. 유이는 꼭 그런 것이 됐다. 초호기는 그녀의 영혼을 담은 그릇이자, 인류가 멸해도 살아남을 씨앗을 품은 뿌리다. 모두가 그녀 위에 선다 — 겐도의 기획도, 레이의 몸도, 신지의 탑승도.

여기서 유이는 레이와도, 뒤에 올 카오루와도 갈린다. 레이의 무아는 아직 켜지지 않은 흐릿함이고, 보완계획의 무아는 모든 막이 녹아 하나로 꺼지는 것이다. 둘 다 사라짐이다. 그런데 유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적멸로 들지 않고, 끝까지 남아 아들을 본다. 녹아 없어진 게 아니라, 머무르려고 몸을 버렸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그 자리에서, 제 경계를 풀어 모두의 바탕이 되어 영영 남는 것. 불교의 눈으로 보면 유이의 사라짐은 가장 완성된 형태의 자비다 — 제 몸을 배로 내어주고, 그 배에 끝까지 남은 보살의 행이다.

닻을 뽑아 모두에게 부은 사람 — 이제마

이제마라면 이 사랑을 어떻게 볼까. 먼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제마도, 그가 선 유학도, 자기를 바치는 죽음을 낮춰 보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길의 극한으로 친다. 공자는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 뜻 있는 이는 살자고 인(仁)을 해치지 않고, 제 몸을 죽여서라도 인을 이룬다 — 고 했고, 맹자는 삶과 의(義)가 함께 갈 수 없을 때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捨生取義)고 했다. 나라를 위해, 어버이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충신과 효자를 유학은 가장 높이 기린다. 그러니 자식과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던진 유이를, 이제마라고 어찌 낮춰 보겠는가. 유이에게는 이룰 것이 분명히 있었고, 다른 길도 없었다. 그 희생은 자포자기가 아니라 살신성인의 무게를 지닌다. 이제마는 그 무게를 받는다.

받으면서, 그는 제 이론에 접혀 있던 한 자락을 본다. 「我身立局」 — 내 몸이 국(局)을 세운다. 이 구절을 그는 늘 닻으로 읽었다. 국을 박고, 그 자리를 끝까지 책임지라고. 그런데 이 문장의 주어는 국이 아니라 나(我)다. 「我自爲身」 — 내가 내 몸을 스스로 한다. 못남을 면하는 것도 나에게 달렸다(「我之免不肖在我也」). 국을 세운 것이 我라면,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그 국을 푸는 것 또한 我의 몫일 수 있다. 我窮解局 — 궁한 끝에 제 국을 푼다. 이제마가 글로 적지는 않았으나, 我身立局이라는 말 안에 처음부터 접혀 있던 반쪽이다. 유이는 그 반쪽을 끝까지 산 사람이다. 제 국을 제 손으로 풀어, 모두가 디딘 바닥에 부었다.

다만 받는 것과 완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살신성인의 成은 終이다 — 죽어 닫혀야 완성된다.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은 한 사람으로 제 자리를 지키다 거기서 끝난다. 닫힌 한 생이 그의 완성이다. 유이는 거기서 갈린다. 그녀는 국을 풀되, 죽지 않았다. 적멸로도 죽음으로도 닫히지 않고, 초호기 안에 영영 남았다. 닫히지 않은 살신이다. 무게는 살신성인과 같되, 완성의 형식 — 닫힘 — 이 없다. 같은 풂(解局)이 두 곳으로 갈린다. 죽어 닫히면 살신성인이 되고, 닫히지 않고 모두의 바탕으로 남으면 다른 것이 된다. 이제마가 기리는 건 앞쪽이다.

그 다른 것이 굳음(固體)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여기서 굳음은 멈춘 돌이 아니다. 유이가 된 그 바탕 — 유식이 아뢰야식이라 부른 그 뿌리 — 은 오히려 쉬지 않고 세차게 흐른다(恒轉如暴流). 초호기는 멈춰 있지 않다. 영원히 떠돌며 인류가 있었다는 증거로 흐른다. 그런데 그 흐름에는 한가운데에서 마주 부딪혀 방향을 되돌려줄 국이 없다. 「局命我能」 — 능(能)은 국에게만 있다. 바탕은 남을 받칠 뿐, 제 길을 제 손으로 돌리지 못한다. 그래서 유이의 場은 가장 세차게 흐르면서 영영 못 돈다. 이제마가 곤잠(坤箴)에서 굳어진 것은 생명이 없다고 한 건, 흐름이 멎었다는 말이 아니라 돌이킴(反誠)이 없다는 말이다. 가장 살아 흐르는 듯한, 가장 단단한 흐름.

불교는 이 자리를 정반대로 부른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不住)고, 그래서 자유라고. 무주처열반 — 머묾 없이 모두를 위해 흐르는 자비. 그런데 같은 그 不住를, 이제마는 마주설 자리를 잃어 영영 제자리로 못 돌아오는 가장 깊은 굳음으로 읽는다. 한쪽이 자유라 부르는 것을 다른 쪽은 고체라 부른다. 둘 다 제 자리에서는 옳다 — 다만 서는 자리가 다르다. 모두의 바탕이 되어 영영 흐르겠다는 것은, 매 순간의 자잘한 되돌림을 건너뛰고 단숨에 끝에 가 닿겠다는 것이다. 이제마의 반성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거듭 돌아오고 거듭 잃으며(屢復屢失), 매번 부득이 제자리로 기어 돌아오는 겸손한 움직임이다. 그는 쉰일곱에도 제 안에서 솟구치는 굳으려는 욕심을 자각하고 매번 되돌렸다고 적었다. 끝점은 없다. 모두의 절대적 바탕이 되겠다는 마음은, 가장 너그러워 보이지만 그 끝없는 되돌림을 단숨에 뛰어넘으려다 한자리에 박혀 굳는다.

그렇다고 국을 푸는 것 자체가 길이 되는 건 아니다. 이제마는 의사다. 의원의 첫 법은 목숨을 지키는 것(保命)이고, 그의 의학은 통째로 거기서 나왔다. 그러니 사람의 길은 어디까지나 국으로 남아 매 순간 되돌리는 데 있고, 제 국을 푸는 일은 머물러선 더 지킬 수 없는 막다름에 이르러, 그것도 죽음으로 닫힐 때에만 허락되는 예외다. 맹독을 다루는 그의 법이 그랬다 — 살릴 수 있으면 쓰지 않고, 달리 길이 없을 때에만 최소로, 낌새를 보아 가며 썼다. 사람을 보는 눈도 같았다. 용방과 비간은 폭군에게 바른말을 하다 죽었고, 문왕은 같은 폭군에게 갇혔으나 중용(中庸)으로 위기를 벗어나 살아남아 더 큰 것을 이뤘다. 충(忠)은 반드시 해야 하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룰 것이 분명하고, 다른 길을 정말 다 더듬어보았고, 그리고 닫힐 때 — 그 셋을 다 갖춰야 비로소 살신성인이 된다. 하나라도 빠지면 그것은 맨손으로 범을 잡는 일(暴虎馮河)이다. 하물며 죽지도 않고 모두의 영원한 바탕이 되겠다는 자리 — 유이가 간 그 자리는, 자비의 완성처럼 보여도 길로 삼을 것이 못 된다. 흉내 내면 굳을 뿐이다.

그래서 가장 너른 사랑이, 이제마의 눈에는 영영 풀리지 않는 굳음으로 남는다. 한번 그렇게 굳은 국은, 물을 다스린 성왕도 되돌리지 못한다. 다스림으로도 반성으로도 막지 못한 자리 앞에서, 옛사람은 강에 걸어 들어간 이를 두고 노래만 불렀다 — 公無渡河, 그대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당해 어찌하리(當奈公何).

그 굳음이 무엇을 했는지는, 그녀가 살리려 한 두 사람을 보면 또렷해진다. 아들은 그 기계 안에 들어가 싸운다. 어머니는 분명히 거기 있다 — 그를 감싸고, 몇 번이고 그를 살린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는다. 보호는 받는데, 마주 볼 사람이 없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끝내 닿지 못하는 어머니다. 남편은 더하다. 죽은 아내라면 슬퍼하고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유이는 죽지 않고 초호기 안에 남아 있다 —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곳에. 애도할 수도, 다시 만날 수도 없는 자리. 프로이트라면 잃은 적 없는 대상이라 불렀을 것이다. 현실에 부딪혀 닳을 기회를 얻지 못한 대상은 영영 완벽한 채로 마음을 붙든다고. 겐도가 세계를 녹여서까지 그녀에게 돌아가려는 건, 그녀가 죽지 않고 남아 영영 이상화된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이는 모두를 살렸다. 그러나 살린 바로 그 순간, 아무도 그녀에게 다시 닿을 수 없게 됐다. 죽은 부재라면 언젠가 보낼 수 있다. 살아 있는 부재는 보낼 수도 닿을 수도 없다. 가장 단단한 고정점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 모두를 살리고, 모두에게서 영영 닿지 않는 한 점이 되어.

빈 중심을 향해 휘는 궤도들
가운데엔 아무 무게도 없는데, 둘레의 궤도가 그 한 점을 향해 휜다.

가장 너른 사랑이 가장 단단할 때

그러니 유이에게는 두 얼굴이 한 몸으로 있다. 불교가 본 얼굴 — 제 몸을 내어 모두의 바탕이 되어 끝까지 남은, 가장 완성된 자비. 이제마가 본 얼굴 — 풀되 닫히지 못해, 매 순간 되돌릴 자리를 영영 잃은 굳음. 둘은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의 한 행위다. 가장 너른 사랑이 곧 가장 단단한 굳음이라는 것. 모두를 받치려고 제 자리를 푼 사람이, 바로 그래서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바탕으로 남았다는 것.

이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이제마에게 굳음은 죄가 아니라, 흐르던 것이 한자리에 박힌 상태일 뿐이다. 유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을 했다. 다만 그 사랑이 제 국을 닫아 완성하는 자리가 아니라, 풀어 모두에게 붓고 닫지 않은 자리였을 뿐이다. 그 자리에서는 더 돌이킬 수 없다. 모두가 그녀의 바탕 위에 서서 — 겐도는 그녀에게 돌아가려 세계를 녹이려 하고, 레이는 그녀의 얼굴로 빚어지고, 신지는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가 싸운다 — 아무도 그 굳음을 풀지 못한 채, 저마다의 노래만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이 굳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다음에 온다.

다시 그 영상으로 돌아간다. 빈 작업복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 자리에 사람은 없는데, 작품의 모든 것이 그 빈자리를 중심으로 돈다. 무게중심이란 게 그렇다. 거기엔 아무 무게도 놓여 있지 않은데, 둘레의 모든 궤도가 그 한 점을 향해 휜다. 몸이 사라진 자리가, 몸이 있던 그 어떤 자리보다 강하게 모두를 끌어당긴다. 무게가 없어서 중심이 되는 게 아니다. 누구도 옮길 수 없어서 중심이 된다. 유이는 그 점이 되기로 했다. 가장 큰 사랑으로, 모두가 끝내 풀지 못할 한 점으로.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