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사랑받을 자격을 의심한 남자 — 『오셀로』 오셀로

사랑받을 자격을 의심한 남자 — 『오셀로』 오셀로

· 최장혁· 오셀로
목차

요즘 ‘자존감’이라는 말이 부쩍 흔하다. 자존감을 키우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 정작 자존감이 낮다는 게 어떤 상태인지는 말하기 어렵다. 증상은 하나 또렷하다. 사랑받고 있는데도 그걸 믿지 못하는 것. 누군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할 때, 고맙기보다 먼저 ‘왜 나를?’ 하는 의심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사랑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지켜보는 것이다.

자존감이라는 말은 결국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로 모인다. 그런데 나를 본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보는 나와 보이는 나가 같은데 어떻게 객관적으로 잴 수 있나. 그래서 우리는 늘 바깥의 거울을 빌린다 —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로 나를 가늠한다. 자존감의 문제는 거기서 갈린다. 그 거울에 얼마나 매여 있는가, 거울에 비친 못난 상을 어쩌는가, 그리고 — 그 거울에 비칠 ‘나’라는 게 정말 고정되어 있기는 한가.

셰익스피어는 이 물음을 끝까지 밀어붙인 인물을 하나 만들었다. 흔히 질투의 화신으로 기억되는 남자, 오셀로다. 그러나 그를 오래 들여다보면 질투는 표면일 뿐이다. 그 밑에는 훨씬 오래된 의심이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정말 사랑받을 수 있을까, 하는.

빌린 거울 — 프로이트

그 첫 번째 거울 — 자존감이 바깥의 사랑에 매여 있다는 것 — 을 가장 먼저, 가장 차갑게 본 사람이 프로이트다. 그는 자존감을 마음가짐이 아니라 들어오고 나가는 사랑의 수지로 봤다. 「나르시시즘 서론」에서 그는 묘한 말을 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겸손해진다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제 안의 무언가가 그 사람에게로 빠져나가, 사랑하는 자는 늘 조금 가난해지고 그 빈자리는 한 가지로만 메워진다 — 그 사랑을 되돌려받는 것. 애초에 우리가 자기를 재는 그 기준부터가 안에서 솟은 게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와 박힌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빌린 거울로 자기를 본다.

문제는 오셀로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이라는 데 있다. 그에게는 평생 따라다닌 자기 이미지가 있다 — 베니스가 받아들인 명예로운 장군. 그러나 그 이미지 밑에는 다른 자기가 있다. 어디에도 온전히 속한 적 없는 이방인. 데스데모나의 사랑은 그 거리를 메워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랑이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문제로 온다. 나 같은 사람을, 그녀가 왜. 사랑이 들어올수록 그는 그것을 누리는 대신 의심한다. 너무 과분한 것은 가짜이거나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무너뜨릴 증거를 찾아 나선다. 자기 파괴처럼 보이지만 실은 방어다 — ‘그녀의 사랑은 진짜였다’를 받아들이는 것보다 ‘역시 그럴 리 없었다’가 그가 평생 믿어온 자기와 어긋나지 않으니까. 그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도 그래서다. 손수건 한 장은 멀쩡한 사람이라면 웃어넘길 증거다. 그러나 오셀로에게 그것은 줄곧 기다려온 증거였다. 그는 속은 게 아니라, 이미 믿고 있던 것을 마침내 믿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차마 못 본 상 — 융

프로이트의 거울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랑이었다면, 융은 다른 거울을 든다 — 그 사랑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프로이트가 오셀로를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로 그렸다면, 융은 같은 사람을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로 그린다. 오셀로에게는 평생을 버텨준 얼굴이 하나 있다. 장군이라는 얼굴. 전장에서, 명령의 자리에서 그는 흠이 없다. 융은 우리가 쓰고 다니는 그런 사회적 얼굴을 두고, 그것은 본디 제 것이 아니라 집단이 빌려준 가면일 뿐이라고 했다. 직함과 한 몸이 된 사람일수록 그 가면 아래에는 뜻밖에 가엾고 작은 것이 들어 있다고. 그는 한 줄을 덧붙인다. 공적으로 ‘강한 남자’가 사생활에서는 흔히 한낱 어린아이라고, 남에게 그토록 요구하던 규율이 사적인 자리에서는 비참하게 무너진다고. 오셀로가 그렇다. 명령으로 사람을 대하는 법밖에 모르는 자가, 명령이 통하지 않는 단 하나의 영역 — 사랑 — 앞에서 무방비로 선다.

가면이 통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그가 마주치는 것은 자기 안의 가장 어두운 한 줄이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융에 따르면 우리가 차마 인정하지 못한 그 못난 부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림자가 되어 반드시 바깥의 누군가에게 던져진다. 우리 안에서 무의식인 것을 우리는 이웃에게서 발견하고, 그에 따라 그를 대한다고 그는 적었다. 오셀로는 ‘내가 부족하다’를 들여다보지 못한다. 대신 그것을 뒤집는다. 부족한 건 내가 아니라, 부정한 건 그녀다.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가 그렇게 견딜 만한 분노로 바뀐다. 융이 니체에게서 빌려온 ‘창백한 범죄자’라는 말이 여기 들어맞는다 — 자기가 무엇인지 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자. 이 구도 속에서 이아고는 외부의 악당이라기보다 오셀로 자신의 어두운 목소리에 가깝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셀로가 이미 무의식에서 믿고 있던 것을 또박또박 말로 옮기는 것뿐이다. ‘정직한 이아고’가 유독 오셀로의 귀에만 정직하게 들리는 건, 그것이 다름 아닌 오셀로 자신의 속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사는 비난에서 그치지 않는다. 못난 자기를 그녀에게 덮어씌운 순간, 데스데모나는 더 이상 바깥의 한 여자가 아니다. 그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떠날 수가 없다 —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날 수 없는 것처럼. 떠나는 대신 그가 택하는 것이 왜 하필 살해인지, 그리고 그녀가 짊어진 그의 일부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융은 한 단어로 짚는다. 모든 남자는 제 안에 여성의 상을 지니고 다니며, 그것이 무의식이기에 늘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사된다고. 오셀로가 데스데모나에게서 사랑한 것은 자기 안에 한 번도 살려본 적 없는 부드러움, 받아들여짐, 무장 해제다. 문제는 투사된 그 상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융은 그것을 관계를 모르는 자가발전적 존재, 오직 그 사람을 통째로 소유하려 드는 무엇이라고 불렀다. 사랑할수록 그는 무력해진다. 자기 영혼의 한 조각이 저 여자의 손에 쥐여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력을 끝내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것을 파괴하는 것. 그가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일 때 죽이는 것은, 실은 자기 안의 통제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다. 잠든 그녀를 앞에 두고 그가 촛불을 들고 망설이는 장면 — 이 빛을 끄고 저 빛을 끄리라 — 은 살인의 머뭇거림이 아니라, 자기 안의 마지막 빛을 제 손으로 끄려는 자의 머뭇거림이다.

저울에서 내려오기 — 불교

그런데 프로이트도 융도 한 가지는 건드리지 않는다. 둘 다 ‘자기’라는 것이 있다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채워야 할 자존감이 있고, 통합해야 할 그림자가 있고, 그 모든 것의 주인인 ‘나’가 있다. 불교는 바로 그 전제를 의심한다. 나 같은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가 — 오셀로의 이 물음은 ‘자격을 잴 수 있는 나’가 어딘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금강경』이 끝까지 되풀이하는 것은, 나라는 상과 남이라는 상에 매달리는 한 그는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잴 고정된 ‘나’가 있다는 생각부터가 이미 집착이라는 것이다. 옛 경전은 더 직접 말한다. 나라 할 것이 없는데 나가 있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뒤바뀐 생각이라고.

이 눈으로 보면 오셀로의 비극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격을 재는 일을 한순간도 멈추지 못해서다. 그는 데스데모나의 사랑 앞에서 쉴 새 없이 자기를 저울에 올린다. 나는 그녀에게 어울리는가, 그녀가 왜 나를, 이게 진짜일 수 있는가. 그 저울질이 곧 괴로움이다. 낮은 점수가 그를 죽인 게 아니라, 점수를 매기는 행위 자체가 그를 갉는다. 그러니 불교가 가리키는 출구는 ‘너는 자격이 있다’가 아니다. 그것은 더 좋은 점수일 뿐, 여전히 저울 위다. 출구는 잴 고정된 너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는 것 — 저울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오셀로는 그러지 못한다.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자기를 잰다. 나를 이렇게 기록해다오, 어리석게, 그러나 너무 깊이 사랑한 자라고. 마지막 숨까지 그는 ‘나’라는 상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세 거울이 한 점으로 좁혀져 칼끝으로 종착하는 구조

한 점으로 모이는 세 거울

세 개의 거울이 한 점으로 모인다. 프로이트의 거울은 빌린 사랑이었고, 오셀로는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융의 거울에는 그가 차마 못 본 못난 상이 비쳤고, 그는 그것을 데스데모나에게 덮어씌워 깨뜨렸다. 불교의 거울 앞에서 그는, 거기 비칠 ‘나’라는 것이 애초에 허상임을 끝내 알아보지 못했다. 오셀로를 죽인 것은 질투가 아니다. 자기를 믿지 못하는 마음 — 더 정확히는, 자기를 재는 일을 멈추지 못한 마음 — 이 사랑을 파괴한 것이다. 진실을 알고 그가 제 가슴에 칼을 꽂을 때, 그 칼은 한 가지를 뒤늦게 증명한다. 데스데모나를 향했던 그 분노가 처음부터 누구를 겨누고 있었는지를.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평생 믿어온 자기 자신이었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