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벗어나지 않은 남자 —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벗어나지 않은 남자 —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

· 최장혁· 오이디푸스
목차

회의실에서 가끔 보는 장면이 있다. 일이 어긋났고, 따져 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규정은 지켜졌고 절차는 밟혔고, 그냥 운이 나빴다. 다들 그렇게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한 사람이 말한다. 제가 놓쳤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는데 가져간다.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그가 손해라는 걸 모두가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방에서 어른은 그 사람 하나로 보인다.

앞 글에서 나는 오이디푸스를 벗어날 수 없던 남자라고 불렀다. 잘남이 미끼였고 자리가 역할을 떠맡겼으니 그를 탓하지 말자고. 글을 닫고 나서도 한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다. 왕비가 제발 그만 캐라고 빌고 늙은 목자가 빌 때, 그는 캐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대목의 그는 떠밀리고 있지 않았다. 멈출 수 있었다. 다만 멈추지 않았다. 한 글자가 달라진다. 벗어날 수 없던 것이 아니라,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짐을 들어주는 손 — 프로이트와 융

오이디푸스를 처음 풀어준 것은 프로이트와 융이다. 둘은 짚는 곳이 다르지만 손짓은 같다. 프로이트의 손에서 신탁은 밖에서 안으로 접힌다. 어머니를 향한 첫 끌림과 아버지에게 품은 첫 미움은 우리 모두의 유년이 되고, 델포이의 예언은 그가 잠들기 전 제 안에 써 둔 대본이 된다. 융은 다른 길로 같은 곳에 닿는다. 근친의 그림은 욕정이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힘이고, 운명은 미처 살지 못한 몫이 밖의 얼굴로 돌아 나온 것이다.

앞 글에서 이 두 독법은 운명이 결국 그의 안에 있었다는 결론을 향한 출발점이었다. 여기서는 다른 쓸모를 갖는다. 죄가 무의식의 일이 되고 못 산 몫의 회귀가 되는 순간, 의식의 그는 한 발 물러서기 때문이다. 그가 작정해서 한 것이 아니다. 그 안의, 그도 모르는 무엇이 했다. 두 사람은 그를 죄인의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로 옮겨 앉힌다. 벌받을 사람이 아니라 분석받을 사람으로. 네가 한 게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 정신분석이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곧 차례로 물릴 면죄장의 첫 두 장이다.

건너뛴 한 줄 — 이제마

앞 글에서 나는 이제마를 그를 풀어주는 쪽에 세웠다. 내게 식견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모이면 속이게 된다 — 자리가 역할을 떠맡긴다는 그 문장을 근거로. 그런데 그 글을 쓰며 나는 그 대목의 한 줄을 건너뛰었다. 모여드는 줄과 속이게 되는 줄 사이에, 이제마는 한 줄을 더 끼워 두었다.

雖有識見 若無信心.

식견이 있어도, 믿음직함이 없다면. 흐름은 두 줄이 아니라 세 줄이었다. 잘남이 사람을 모으는 것까지는 필연이다. 모인 사람들 앞에서 결국 속이게 되는 것도, 조건이 갖춰지면 필연이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조건이 하나 있다. 끊을 수 있는 자리가 문장 안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마는 처음부터 면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리가 깔리는 것은 네 손 밖이지만, 자리와 파국 사이에 네가 설 수 있는 한 뼘이 있다고 같은 잠언 안에 적어 둔 사람이었다. 앞 글의 이제마는 내가 반만 읽은 이제마였다. 그 줄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생각해 보면 앞 글이 말한 그 광학이었을 것이다. 자리 쪽으로 굳은 눈에는 자리의 문장만 보인다.

그리고 그는 다른 글에서 아예 못을 박는다.

禍福無不自己求之.

화도 복도 자기가 부르지 않은 것이 없다. 일찍 죽고 늦게 죽는 것까지 자기가 부른다고 그 뒤에 덧붙인다. 이 문장은 위로의 반대말이다. 네가 부른 것이라는 말은 잔인하게 들리지만, 동시에 너를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짐을 들어주는 대신 짐의 임자를 인정해 주는 것.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국면이 정확히 그 한 뼘 위에서 벌어진다. 왕비가 빌고 목자가 빌던 그 자리가 끊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는 끊지 않았다. 여기까지면 그는 그 한 줄의 덕이 없어 미끄러진 사람이다. 그런데 소포클레스는 한 발 더 간다. 다 알고 난 그가, 몰랐다는 완벽한 무죄를 손에 쥐고도 그것을 쓰지 않는다. 신탁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리라고 했을 뿐, 네 눈을 찌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벌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조건 문장의 빈칸을 그는 파국으로 채우고, 그 파국까지 제 것으로 서명한다. 화복을 자기가 부른다는 말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이 여기 있다.

이제마는 그 부름이 한 번으로 끝난다고 보지도 않았다. 거듭 돌아오고 거듭 잃는다고 — 이긴 판은 한 번도 없다고. 한 번 벌받고 끝나는 속죄였다면 차라리 가벼웠을 것이다. 책임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그것은 도착하지 않는다.

떠안을 나조차 없이 — 불교

가장 깊은 면죄가 아직 하나 남아 있다. 프로이트는 죄를 무의식에 맡기고 융은 운명에 맡겼지만, 죄를 진 ‘그’는 남겨 두었다. 불교는 그 ‘그’마저 거둬 간다. 몸에서도 느낌에서도 생각에서도 ‘나’라 할 것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고 오래된 경전은 말한다. 벌받을 주체부터가 거기 단단히 있던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벌하겠는가. 죄를 바깥으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죄의 임자 자체를 지우는, 한 겹 더 깊은 출구다.

그런데 그는 그 마지막 출구마저 지나친다. ‘나’가 빈 이름이라는 문 앞에서, 그는 없는 그 나를 기어이 다시 세워 벌한다. 잡히지 않는다는 자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거기에 칼을 댄다. 내려놓으라는 자리에서 더 꽉 쥔다. 책임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려면 이 자리를 봐야 한다. 떠안을 나조차 없다는 데까지 가서도, 그는 떠안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밖으로 묻던 눈

그러니 이 남자를 들여다보던 이들이 묘한 처지가 된다. 무의식이 한 것이라고, 못 산 몫이 돌아온 것이라고, 애초에 책임질 나란 없다고 — 저마다 다른 깊이의 면죄장을 내미는데, 정작 당사자가 그것을 차례로 물린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빠져나갈 길을 누구보다 잘 보면서, 굳이 빠져나가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적고 싶다. 그는 평생 밖에 묻는 사람이었다. 제 출생이 궁금하자 델포이로 갔고, 역병의 원인이 궁금하자 다시 델포이로 사람을 보냈고, 그다음엔 예언자를 불렀고, 그다음엔 목자를 불렀다. 답이 저를 가리키고 있는 동안에도 물음은 줄곧 바깥을 향했다. 이제마도 팔괘를 만졌지만 점을 치지 않았다. 괘로 바깥의 길흉을 뽑는 대신, 그 형상은 그저 제 억견이라 물리고서 물음을 안으로 돌렸다 — 내 눈은 지금 얼마나 흐린가. 그 눈으로 다시 보면, 오이디푸스가 제 눈을 찌르는 장면은 평생 밖으로만 향하던 물음이 끊어지는 자리다. 델포이가 답할 수 없는 것을 그는 그날 처음으로 저에게 물었고, 그 물음의 값을 저에게 물렸다.

회의실의 그 사람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대개 신탁을 받지도, 제 눈을 찌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덮으면 편할 일을 굳이 들춰내고, 그 결과를 누구 탓도 아닌 제 것으로 끌어안는 일은 드물지 않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해 주는데 그 말을 받지 않는 순간. 그게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든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순간에만 생기는 것도 있다. 면죄를 받지 않기로 한 자리에서 한 사람은 비로소 누구의 환자도 아닌 자기 자신이 된다. 더 편해지는 길은 아니다. 다만 가끔은 그 편치 않은 쪽이 자기를 자기로 세우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 눈을 찌르는 데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