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끝내 손을 들지 못한 남자 — 『햄릿』 햄릿

끝내 손을 들지 못한 남자 — 『햄릿』 햄릿

· 최장혁· 햄릿
목차

며칠째 답장 하나를 미루고 있었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무슨 말을 쓸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다 써두었다. 그런데 막상 화면 앞에 앉아 커서가 깜빡이기 시작하면 손이 멈췄다.

그날도 다른 일은 평소처럼 다 했다. 진료를 보고, 처방을 내고, 급한 전화에는 곧바로 답했다. 꼭 그 하나만, 가장 쉬운 그 하나만 손이 가지 않았다. 못 쓰는 게 아니다. 안 쓰는 것도 아니다. 쓰려고 하는데 안 써진다. 이 셋은 분명히 다른데, 그 차이를 설명하려 들면 말이 엉킨다.

그날 저녁 책장에서 햄릿을 꺼낸 건 거의 우연이었다. 햄릿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휘장 뒤에 숨은 폴로니우스를 망설임 없이 찔러 죽이고, 자기를 팔러 온 두 친구를 영국으로 보내 처형되게 만든다. 무엇이든 한다. 단 하나, 삼촌을 죽이는 그 하나만 못 한다. 사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를 우유부단하다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늘 답이 아니라 회피처럼 들렸다.

사실 흔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람난 아내를 죽이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술로 무너지는 남자. 그런 남자라면 우리는 이미 안다. 감옥이 무섭고, 자식이 눈에 밟히고, 미운데 미워만 할 수는 없는 미련이 남아서. 이유가 다 밖에 있다. 그래서 이해는 돼도 들여다볼 건 없다. 그럴 만하네, 하고 끝난다.

햄릿이 그 남자와 갈라지는 건 한 지점이다. 햄릿에게는 밖의 이유가 하나도 없다. 왕자이고, 복수는 정당하다. 감옥 갈 일도, 눈에 밟힐 자식도, 삼촌을 향한 미련도 없다. 죽일 기회조차 여러 번 있었다. 바깥에 아무 이유가 없는데 손이 묶인다. 그러면 이유는 안에 있다는 뜻인데, 그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바닥 없음을 만든 건, 삼촌이 그냥 적이 아니라 거울이라는 사실 하나다.

거울이 된 적 — 프로이트

프로이트라면 이 묶임을 뭐라고 불렀을까. 『꿈의 해석』의 한 대목에서 그는 의외로 짧게, 거의 지나가듯 햄릿을 짚는다. 햄릿의 문제는 우유부단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아버지를 없애고 그 자리를 어머니 곁에서 차지한 그 남자, 자기 어린 시절의 억압된 소원이 실현된 것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그 남자를 죽이는 일만 빼고. 삼촌은 햄릿이 어릴 적 아버지에게 몰래 품었던 그 소원을 현실에서 대신 저질러버린 사람이다. 그를 베면 햄릿은 자기 자신을 베는 셈이 된다. 그래서 복수를 떠밀어야 할 혐오가 방향을 틀어 자기를 향한다. 자기가 벌하려는 죄인보다 자기도 나을 게 없다는 가책으로.

여기서 이 희곡의 농담이 드러난다. 오이디푸스 소원 자체는 흔하다. 누구나 어릴 때 그런 소원을 품고, 눌러서 어른이 된다. 보통은 그걸 평생 무의식에 묻어둔 채 산다. 건드릴 일이 없으니까. 그런데 햄릿에게는 그 소원을 실제로 해버린 사람이 눈앞에 있다. 형을 죽이고 형수를 차지하는 짓을, 삼촌이 대신 저질렀다. 흔해 빠진 소원이 대행자 한 명 때문에 최악의 덫이 된다. 보통 사람은 소원을 묻으면 그만이지만, 햄릿은 자기 소원이 왕관을 쓰고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는 걸 매일 봐야 한다. 묻을 자리가 없다.

그러니 햄릿이 못 하는 건 삼촌 살해 하나가 아니다. 삼촌을 죽이려 하면 양심이 막아선다. 너도 같은 소원을 품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죽이지 않아도 같은 양심이 또 막아선다. 아버지의 명을 저버린 자라고. 어느 쪽으로 가도 자기를 단죄하는 목소리가 먼저 도착한다. 죽여도 무너지고, 안 죽여도 무너진다. 출구가 없는 덫이다. 양심이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든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까지는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마음에 걸린다. 프로이트의 이 도식은 삼촌을 못 죽이는 것 하나만 설명한다. 정작 햄릿이라는 사람 전체가 검게 물드는 건 설명하지 못한다. 한 사람을 못 죽이는 국소의 마비가 어떻게 세상 전체를 잡초 무성한 폐원으로 보이게 하고, 살아 있는 것 자체를 버겁게 하고, 끝내 죽음에 끌리게 하는가. 가책 하나로는 이 전면적 어둠이 안 된다. 프로이트는 「슬픔과 우울」에서 햄릿을 한 번 더 부르면서도, 정작 그 우울은 들여다보지 않는다. 남의 이론을 비추는 거울로만 잠깐 쓰고 지나간다.

그러니 물음은 하나로 좁혀진다. 햄릿은 왜 우울한가. 삼촌을 못 죽이는 건 알겠다. 그런데 왜 그 막힘이 사람을 통째로 가라앉히는가. 프로이트가 닫지 않고 둔 그 자리에, 다른 손들이 들어온다.

도려낸 사랑 — 융

융이라면 그 우울을 정반대로 봤을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억눌린 게 새어나온 건 고장이다. 도로 눌렀어야 할 게 새어나와 병이 됐다는 것. 융에게는 무의식이 떠오르는 게 누수가 아니라 올라오려고 올라온 것이다. 그는 우울을 두고, 의식이 비고 무의식이 활성화된 상태이며 그 내용이 의식화되어야 비로소 효력을 낸다고 적었다. 바깥세상에서 에너지가 다 빠져 안으로 내려간 것. 그 내려감은 병이 아니라 하강이다. 그러니 햄릿이 무너진 건 무의식이 올라와서가 아니라, 올라온 그것을 받아 안지 못해서다. 받았으면 변형이 됐을 것을, 못 받아 함몰만 됐다.

그런데 햄릿이 받지 못한 그것은 무엇이었나. 융이라면 어머니를 짚었을 것이다. 한 남자가 마음에 지니는 여성의 상은 늘 어머니에게서 처음 빚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영혼의 상을 처음 지는 이는 언제나 어머니이고, 나중에 그것은 그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들이 이어받는다는 것. 햄릿에게 그 상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아버지가 죽은 지 한 달도 안 되어 삼촌과 재혼한 어머니.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그 말은 어머니를 향한 말이다. 그러나 융이 보았을 핵심은, 그 말이 어머니 한 사람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어머니의 배신이 방아쇠가 되어, 그 밑에 깔려 있던 여성의 상 전체가 깨어난다. 한번 깨어난 그 상은 눈앞의 모든 여자에게 덧씌워진다.

오필리아가 그 증거다. 오필리아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햄릿은 그녀를 어머니만큼이나 잔인하게 내친다. 수녀원으로 가라고. 어머니 한 사람으로는 이 잔인함이 설명되지 않는다. 융으로 보면 깔끔해진다. 햄릿이 미워하는 건 어머니도 오필리아도 아니라, 두 여자에게 동시에 덧씌워진 자기 안의 더럽혀진 여성상이다. 밖으로 나가 한 여자에게 가닿았어야 할 사랑이, 깨어진 그 상에 막혀 안으로 감겨든다. 밖으로 못 간 사랑이 곧 그의 멜랑콜리다.

부딪혀 굳은 면 — 이제마

여기까지 두 사람을 따라오면, 한 가지가 자꾸 걸린다. 이게 정말 그 사람 안에서만 일어난 일일까. 햄릿은 처음부터 우울한 사람이 아니었다. 프로이트조차 그가 본래 멀쩡했다고 적는다. 그 우울은 삼촌이 형을 죽이고 어머니를 차지한 바로 그 일과 함께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햄릿이 혼자 키운 게 아니라, 햄릿이라는 한 사람과 삼촌이라는 또 한 사람이 부딪힌 자리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제마라면 그 부딪힌 자리를 들여다봤을 것이다. 그가 평생 들여다본 게 그거였으니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둘 사이에 어떤 면이 생긴다. 한쪽이 어느 방향으로 굳어 있으면 그 면이 함께 굳고, 굳은 면에서는 멀쩡한 것조차 비뚤어져 보인다. 이제마는 이 비뚤어짐이 마음먹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굳은 유리를 통과한 빛이 휘듯, 그건 의지가 아니라 광학이다. 햄릿이 삼촌에게서 자기를 본 것은 그렇게 보기로 한 게 아니다. 두 사람이 같은 소원을 품었다는 지독한 우연이, 둘이 맞닿은 면을 거울로 굳혀버린 것이다.

한번 굳은 면은 다른 모든 면으로 번진다. 어머니가 굳었고, 그 굳음이 오필리아로 옮아갔다. 오필리아가 무고한데도 어머니의 얼굴로 보이는 건 햄릿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미 굳은 면 너머로만 세상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마는 한 집안에서 선과 악이 서로 갈리면 쇠망이 따르고, 충신과 아첨이 다투면 살육이 반드시 온다고 적었다. 엘시노어가 그 갈리는 면이다. 부딪힌 두 사람이 점점 더 많은 이를 그 면으로 끌어들이고, 끝내 거의 모두가 그 위에서 죽는다.

그런데 면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이미 재혼했다. 굳은 자리를 햄릿이 되돌릴 길은 없다. 이제마가 내놓은 것도 면을 이기는 법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굳은 길로 흘러가기 직전에 다른 결로 잠깐 비켜서는 것을 말했다. 도달점은 없다. 매번 같은 자리로 되돌아오고, 이긴 판은 한 번도 없다. 그저 굳어가는 그 찰나에 한 번씩 비켜서는 것. 햄릿은 끝내 그 비켜섬에 이르지 못한다. 굳은 면 위에 그대로 굳어, 행동 대신 말을, 다시 말을, 또 말을 쏟는다.

닫히지 않은 문 — 불교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세 사람은 결국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햄릿이 누구와 부딪혀 어떻게 굳었는지를 묻는 자리. 프로이트의 거울도, 융의 깨어난 상도, 이제마의 굳은 면도, 전부 부딪힘을 전제한다. 누구와 부딪혔고, 무엇이 굳었고, 그게 어떻게 번졌나.

그런데 책장 한 칸 옆에는 그 질문 자체를 무너뜨리는 책들이 있다. 불교라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 면이 정말 있긴 한가. 햄릿이 갇혔다는 그 감옥은, 그가 실재라고 붙잡은 것 아닌가. 거울에 비친 게 나라고 움켜쥐고, 굳은 면을 진짜라고 끌어안고, 그 위에서 괴로워하는 것 자체가 집착이다. 불교에는 이 면을 푸는 법이 없다. 면을 내려놓는 길만 있다. 풀 방법이 없는 게 결함이 아니라, 그게 그 자리의 성격이다.

햄릿은 그 길 앞까지 간 적이 있다. 광대 요릭의 해골을 손에 들고, 한때 자기에게 입 맞추던 입술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을 때. 그는 살아 있는 모든 게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는 걸 흘끗 본다. 굳은 면이 통째로 부질없어지는 그 순간. 그러나 그는 본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도로 생각으로 움켜쥔다. 무엇을 읽느냐고 묻자 그는 답한다. 말, 말, 말. 무상을 봤으나 내려놓는 법이 없으니, 흘끗 본 그것마저 다시 의심으로, 말로 굳어버린다. 불교는 그래서 햄릿에게 닫히지 않은 문으로만 존재한다. 열고 들어가면 감옥이 사라지는 문인데, 그는 그 앞에서 문고리 대신 자기 말을 만지작거린다.

끝내 손을 들지 못한 남자 — 『햄릿』 햄릿

메울 수도 비울 수도 없는

그래서 사백 년이 지나도 햄릿은 닫히지 않는다. 우유부단으로 닫으면 그가 칼을 뽑던 손이 남고, 오이디푸스로 닫으면 자기를 못 죽이던 망설임이 남는다. 어떤 한 마디로 닫아도 무언가가 비어져 나온다. 우리가 자꾸 그를 한 가지로 설명하려다 실패하는 건, 그의 우울이 메워야 할 빈칸이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빈칸이 아니라 두께다. 한 사람 안의 여러 겹과, 두 사람이 맞닿아 굳은 면이 한꺼번에 겹쳐 있어서, 어느 하나로도 덮이지 않는 두께. 세 사람은 그 두께를 저마다 쌓아 보이고, 불교만은 그 두께마저 내려놓으라 한다. 그러나 햄릿은 끝내 내려놓지 못한다. 그 못 내려놓음 안에서 죽는다. 메워지는 구멍이었다면 누군가 진작 메우고 끝났을 것이다. 비울 수 있는 두께였다면 진작 비워졌을 것이다. 둘 다 안 되니, 그는 사백 년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책을 덮고 다시 화면 앞에 앉았다. 커서는 같은 자리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다만 그 멈춘 손이 조금 덜 낯설었다. 할 수 있는데 안 되는 그 자리에, 누구나 한 번쯤은 앉는다. 다행히 나의 것은 답장 하나였다. 부딪혀 굳은 면도 없었고, 왕국이 걸려 있지도 않았다. 나는 천천히 첫 줄을 썼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