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자꾸 돌아온 소년 — 『에반게리온』 이카리 신지

자꾸 돌아온 소년 — 『에반게리온』 이카리 신지

· 최장혁· 이카리 신지
목차

일요일 오후, 공원에서 자전거 배우는 아이를 한참 봤다. 보조바퀴를 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아이는 대여섯 미터를 가다 넘어지고, 일어나 바지를 털고, 다시 올라탔다. 옆의 어른은 이상하리만치 손을 대지 않았다. 잡아 주지도 일으켜 주지도 않고, 반 발짝 뒤에서 같은 속도로 걸을 뿐이었다. 넘어진 횟수를 세면 그 오후는 실패의 기록이 되고, 다시 올라탄 횟수를 세면 연습의 기록이 된다. 같은 오후가 두 장부에 다르게 적힌다.

돌아오는 길에 그 아이가 자꾸 생각났다. 나는 두 달 가까이 『에반게리온』의 인물들을 차례로 읽어 왔다. 열두 명. 이제 한 사람이 남았다. 열두 명 전부와 맞닿았던 소년.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넘어진 사람 — 그리고 세는 장부를 바꾸면, 가장 여러 번 다시 올라탄 사람. 이카리 신지. 도망치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며, 그는 도망치고, 돌아오고, 다시 도망치고, 다시 돌아왔다.

자아 위에 떨어진 그림자 — 프로이트

이 소년의 말버릇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나 같은 건. 어차피 나는. 그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병기에 타는 사람이면서, 제 값을 매기는 데는 늘 헐값이다. 프로이트는 상실을 앓는 사람들을 오래 들여다본 글에서 이런 자기비난의 기묘한 점 하나를 짚었다. 환자의 격렬한 자기 고발을 참을성 있게 듣다 보면, 그 고발이 정작 본인에게는 거의 들어맞지 않고, 조금만 고치면 그가 사랑하는 — 사랑했던, 사랑해야 했던 — 다른 누군가에게 들어맞는다는 것.

the self-reproaches are reproaches against a loved object which have been shifted away from it on to the patient's own ego

자기비난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비난이 자리를 옮겨 제 자아 위에 내려앉은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문장이 이어진다.

Thus the shadow of the object fell upon the ego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떨어졌다. 신지의 장부를 이 문장 위에 얹으면 셈이 맞는다.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눈앞에서 사라졌고, 아버지는 그를 버리고, 불러들이고, 다시 버렸다. 떠난 사람과 버린 사람을 향해야 할 말들 — 왜 나를 두고 갔느냐 — 은 갈 곳이 없고, 갈 곳 없는 비난은 자아 위로 떨어진다. 나 같은 건, 은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이다.

프로이트에게는 이 소년에게 들어맞는 글이 하나 더 있다. 그는 한 살 반짜리 손자가 실패를 가지고 노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아이는 실패를 커튼 친 침대 너머로 던지며 오-오-오 소리를 내고, 실을 당겨 꺼내며 기쁘게 외쳤다. 다! 저기 있다. 사라짐과 귀환 — 그것이 놀이의 전부였다. 프로이트의 해석은 이랬다. 아이는 어머니가 떠나는 것을 항의 없이 견뎌야 했고, 그 견딤을, 제 손이 닿는 물건의 사라짐과 귀환을 스스로 연출하는 것으로 갚았다고.

he was overpowered by the experience; but, by repeating it, unpleasurable though it was, as a game, he took on an active part

당한 것을, 제 손으로 반복함으로써, 능동으로 바꾼다. 신지가 에바를 대하는 방식이 이 실패 놀이다. 그 기체 안에는 사라진 어머니가 있다. 타는 것은 다, 도망치는 것은 오-오-오. 혼자 당한 사건을, 그는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제 손의 놀이로 바꾸려 한다. 극장판 네 편은 그 놀이를 세계 단위로 확대해 돌린다. 같은 소년이, 같은 자리에서, 다시. 다만 아이의 놀이에는 끝이 있었다. 실패는 당기면 돌아온다. 신지의 실패에는 실이 없다. 당겨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고, 그래서 놀이가 끝나지 않는다. 반복의 이유는 이 글이 설명해 주는데, 끝나는 법은 적혀 있지 않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 — 융

융이라면 이 반복의 끝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가 평생 쓴 말 가운데 가장 수수한 것이 개체화다. 거창한 정의 대신 그는 이렇게 옮겨도 좋다고 했다.

We could therefore translate individuation as 'coming to selfhood' or 'self-realization.'

자기 자신이 되는 일. 마지막 편의 마지막 장에서 신지가 하는 일이 이 작업의 도해처럼 보인다. 그는 한 사람씩 만나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아스카와, 카오루와, 그리고 레이와. 각자에게 걸어 두었던 것 — 인정, 구원, 어머니의 얼굴 — 을 하나씩 거두어들이고 작별한다. 남에게 걸어 둔 것을 회수한 자리에만 자기가 남는다. 그리고 융의 문장 가운데 뜻밖의 것이 하나 있다.

the process of individuation must lead to more intense and broader collective relationships and not to isolation

개체화는 고립이 아니라 더 넓고 짙은 관계로 이어져야 한다.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 세상을 등지는 일이라면 그것은 개체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지막 장면이 산사나 무인도가 아니라 출근길 역인 이유가 이 문장에 있다. 다만 융의 지도에는 목적지가 그려져 있다. 의식과 무의식을 아우르는 전체 — 도달할 수 없는 끝없는 근사라고 단서를 달면서도, 그는 겨눌 점 하나를 지도 위에 찍어 둔다. 함경도의 의사는 그 점마저 지운다.

자꾸 잃는 사람의 서문 — 이제마

이제마의 잠언집에는 서문이 하나 붙어 있다. 여덟 괘의 잠언을 다 적고 나서 그는 책 이름이 왜 ‘성(誠)으로 돌아감’인지 스스로 묻고 이렇게 답한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천 번 만 번 생각해도 속이려는 마음이 끝이 없었고, 행하면 번번이 낭패였고, 갈수록 곤하고 갈수록 굽어, 어쩔 수 없이 성으로 돌아와 스스로 경계했다고. 돌아와도 거짓을 면하지 못해 자꾸 회복하고 자꾸 잃으면서 — 屢復屢失 — 자경에 이르렀다고. 그리고 한 줄을 덧붙인다. 올해 쉰일곱인데 아직도 그 버릇을 잊지 못해 더욱더 경계하니, 거짓이란 참 어렵구나.

쉰일곱의 의사가 제 책 서문에 적어 둔 것치고는 이상한 문장이다. 두 달 동안 나는 이 여덟 잠언을 격자 삼아 열한 명을 앉혔고, 한 명 앞에서는 빈칸을 받아 적었다. 그러는 내내 격자를 완성된 진단 도구처럼 다뤘다. 그런데 서문으로 돌아와 보면, 이 격자를 만든 사람은 완성된 자리에서 쓰지 않았다. 자꾸 잃는 자리에서 썼다. 잠언은 도달한 사람의 훈시가 아니라 아직도 넘어지는 사람의 자경문이었다.

신지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많이 넘어지는 사람이다. 도망치고, 돌아오고, 다시 도망친다. 극장판 네 편은 그 반복을 아예 세계 단위로 돌린다. 같은 소년이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이 반복을 실패의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그렇게 읽고 지쳤다. 그런데 이제마의 장부로 세면 숫자가 달라진다. 그는 속이려는 마음이 일어나되 행하기 전에 돌아오는 것, 그것을 학문이라 불렀다. 완성이 아니라 일어남과 돌아옴 사이의 짧은 간격이 공부의 전부라고. 그렇다면 자꾸 잃는 것은 자격 미달의 증거가 아니라 이 공부의 정의 그 자체다. 잃지 않는 자는 돌아올 일도 없다. 카오루는 단 한 번에 완성했고, 그래서 이 잠언집의 독자가 아니었다. 이 책은 신지 같은 사람 앞으로 쓰였다. 맨 앞장에 서명한 첫 독자가, 함경도의 쉰일곱 살 의사였다.

이 서문 곁에는 총결이 하나 더 있다. 여덟 괘의 잠언을 다 늘어놓은 뒤 이제마는 그것을 한 문장으로 거둔다.

八卦皆心也

여덟 괘는 모두 마음이다. 두 달 동안 나는 여덟 칸에 열한 명을 앉혔다. 잃은 것을 움켜쥔 아버지,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던 보호자, 홀로 가서 이룬 친구. 그런데 총결의 눈으로 다시 보면 그 여덟 칸은 애초에 열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한 마음이 여덟 방향의 접촉면에서 띠는 여덟 국면 — 그리고 이 작품에서 그 여덟 접촉면을 전부 제 살로 받아낸 사람은 하나뿐이다. 아버지의 움켜쥠도, 보호자의 버팀도, 친구의 홀로 감도, 전부 그의 맞은편에서 일어났다. 열한 편의 괘와 한 장의 빈칸은 결국 이 소년의 마음이 여덟 자리에서 찍힌 사진첩이었다.

여기서 융과 이제마가 갈린다. 융의 개체화에도 끝은 없지만, 끝없는 길 저쪽에 전체라는 점이 찍혀 있다. 이제마의 서문에는 점이 없다. 쉰일곱에도 자꾸 잃는다는 고백뿐이다. 대신 그는 완성을 다른 곳에 옮겨 둔다. 일어남과 돌아옴 사이 — 마음이 일어나되 행하기 전에 돌아오는 그 짧은 간격이, 매번, 통째로 완성이라고. 신지의 네 편짜리 반복을 이 장부로 다시 세면, 그것은 실패의 목록이 아니라 돌아옴의 목록이 된다.

어깨에 메지 않는 뗏목 — 불교

남는 물음이 하나 있다. 돌아옴이 공부라면, 에바는 무엇인가. 그를 여기까지 건너게 해 준 것은 결국 그 기체다. 어머니를 만나는 유일한 자리였고, 아버지가 그를 부르는 유일한 이유였고, 그가 쓸모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함경에 강을 건넌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풀과 나무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건넌 사람이 생각한다. 이 뗏목이 내게 이익이 많았다. 이제 어깨에 메거나 머리에 이고 가리라. 부처는 묻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뗏목을 옳게 쓰는 일이겠느냐. 아니다. 물에 도로 두거나 언덕에 두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맺는다. 법도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신지의 마지막 선택이 그 언덕의 손이다. 그는 에바를 부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고마웠던 것을 고마웠던 채로, 에바가 없어도 되는 세계 쪽으로 이야기를 다시 쓴다. 안녕, 이라고 말하면서. 건네준 것을 이고 다니지 않는 것 — 그것이 그 배에 대한 예의라고, 오래된 경전은 말한다.

하나의 가는 선이 오른쪽으로 나아가며 고리를 네 번 그리고, 고리가 바닥에 닿는 자리마다 청록 점이 찍히며, 마지막 고리를 벗어난 선이 오커색으로 우상향하는 다이어그램

넘어져도 되는 채로

마지막 장면의 역 계단을, 나는 마리 편에서 한 번 적었다. 목줄을 벗긴 손은 여덟 칸 밖에서 왔다고. 이제 그 손을 받은 쪽을 적을 차례다. 목줄이 벗겨진 목의 임자는, 여덟 칸 전부와 맞닿았던 마음이다. 격자 밖에서 온 손과 격자를 다 지나온 마음이 손을 잡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화면은 그림에서 실사로 바뀐다. 괘는 진단이지 운명이 아니다 — 그 문장을 이 장면만큼 정확히 그린 그림을 나는 달리 모른다.

공원의 아이를 다시 생각한다. 그 아이는 언젠가 자전거를 탈 것이다. 그런데 탄다는 것은 더는 안 넘어지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넘어져도 되는 채로, 넘어짐을 셈하지 않는 채로, 멀리 가게 된다는 뜻이다. 반 발짝 뒤에서 걷던 어른은 그것을 알아서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쉰일곱의 의사가 서문에 거짓이란 참 어렵구나, 라고 적으면서도 책을 끝내 묶어 낸 것도, 아마 같은 앎이었을 것이다.

열세 번째 글을 닫는다. 두 달 동안 렌즈를 갈아 끼우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은 칸에 앉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은 그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비출 뿐이고, 그는 내일 다른 자리에 선다. 자꾸 잃고, 자꾸 돌아오면서.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