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살아서 멀어진 여자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

살아서 멀어진 여자 —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

· 최장혁· 시키나미 아스카 랑그레이
목차

스무 살 무렵에 본 영화를 마흔이 넘어 그 속편으로 다시 만나는 일이 있다. 그럴 때 이상한 건, 스크린 속 인물은 그대로인데 그를 보는 내가 달라져 있다는 거다. 같은 장면이 그때는 가슴을 쳤는데 지금은 피식 웃게 만든다. 웃는데 어딘가 쓸쓸하다.

나에게는 에반게리온의 아스카가 그랬다. 스무 살의 나는 구판에서 신지와 아스카가 서로를 못 견뎌 하면서도 끝내 못 놓는 그 관계에 묶여 있었다. 마흔 중반에 신극장판을 봤을 때, 그 아스카는 신지와 절대 이어지지 않고 전혀 다른 남자 옆에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신지는 또 다른 여자에게 갔고. 극장을 나서며 나는 좀 웃었고 좀 헛헛했다. 아, 첫사랑은 끝났구나, 하고.

흔히 신극장판의 아스카를 두고 드디어 치유됐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이 글에서 그녀가 나았는지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 더 궁금한 건 따로 있다. 구판에서 그토록 못 놓던 그 관계를, 신극장판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보낼 수 있게 만들었는가. 그것도 슬픔이 아니라, 피식 하는 웃음으로.

죽은 첫사랑과 살아서 멀어진 첫사랑 — 프로이트

프로이트는 잃음에 두 길이 있다고 적었다. 표준판 열네 권째, 「애도와 멜랑콜리」. 멜랑콜리는 잃은 대상을 끝내 못 보내고 제 안으로 끌어들여 같이 굳는 것이다. 그 대상을 향했어야 할 원망이 갈 곳을 잃고 자기에게로 돌아선다. 프로이트는 그걸 한 문장으로 눌렀다.

Thus the shadow of the object fell upon the ego.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운다. 잃은 사람이 떠나지 않고 내 안에 들러붙어, 나는 그를 미워하는 대신 나를 미워하게 된다. 애도는 반대다. 그 대상에 묶인 끈을 기억 하나하나에서 끌어올려 다시 붙들었다가 거기서 풀어내는 노동이다. 단번에가 아니라 조금씩, 막대한 시간과 품을 들여서. 그 일이 다 끝나야 비로소 자아는 다시 가벼워진다. 애도의 가벼움은 그 노동의 대가다.

구판의 신지와 아스카는 멜랑콜리였다. 두 굳은 사람이 서로를 못 놓고 부딪히다, 엔딩에서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데까지 간다. 못 보낸 관계가 안에서 둘을 잡아당겨 같이 무너진 거다. 나는 이 자리를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 겐도다. 초호기 안에 남은 유이를 영영 못 보내 굳은 남자. 죽었으되 사라지지 않은 대상, 그래서 보낼 수 없는 대상. 구판의 아스카도, 겐도도, 못 보내서 굳었다. 멜랑콜리에는 출구가 없다. 대상이 죽거나 박제되어 영영 거기 머무는 한.

신극장판이 한 일은 그 대상을 죽이지도 박제하지도 않은 것이다. 아스카는 켄스케 옆에서 멀쩡히 어른이 되고, 신지는 마리에게 간다. 비극도 아니고 미화도 아니다. 그냥 각자 다른 짝을 만나 평범하게 산다. 김이 빠질 만큼 담담하게. 그런데 바로 그 김빠짐이 결정적이다. 첫사랑이 비극으로 끝나거나 추억으로 박제되면 평생 멜랑콜리로 남지만, 살아서, 닿지 않는 곳에서, 딴 사람과 그냥 잘 살아주면 — 좀 분하고 좀 허탈하지만 — 비로소 보낼 수 있게 된다. 죽은 부재는 못 보내고 굳지만, 살아서 멀어지는 부재는 보낼 수 있다. 안노가 아스카를 다른 남자에게 줘버린 그 김빠짐이, 사실은 애도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조건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이 애도를 수행하는 건 화면 속 아스카가 아니다. 그녀는 제 끈을 하나씩 푸는 그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삶을 살 뿐이다. 끈을 푸는 건 객석이다. 스무 살에 그 부딪힘에 묶였던 사람이, 마흔에 그 부딪힘의 종료를 보며 제 첫사랑의 끈을 푼다. 화면은 보낼 대상을 살려서 멀찍이 세워두고, 보내는 일은 보는 사람에게 맡긴다. 그게 멜랑콜리에는 없고 애도에만 있는 감정으로 드러난다. 웃픔이다. 비극에는 웃음이 없고 집착에도 웃음이 없다. 역시 늙었구나, 하고 피식 웃으며 쓸쓸해지는 그 헛헛함이, 끈이 풀리는 순간의 정확한 질감이다.

싸울 상대가 사라진 아수라 — 불교

구판의 아스카를 오래 본 사람은 그녀에게서 늘 어떤 전투 태세를 읽었을 것이다. 누가 건드리지 않아도 먼저 날을 세우고,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고, 곁의 사람을 끝내 경쟁자로 돌려세우는. 불교라면 이 자리를 아수라라 불렀다. 아수라는 힘으로는 천(天)에 못지않으나 마음에 탐냄과 질투가 가득해, 천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으로 제 존재를 삼는 무리다. 경은 그 싸움의 뿌리를 분명히 짚는다. 모든 원한이 생기는 것은 탐냄과 질투 때문이라고.

묘한 건 아수라를 묶는 것의 정체다. 아수라왕 비마질다라가 천에게 패해 다섯 가닥 밧줄에 묶여 끌려온 이야기가 있다. 그 밧줄은 천이 채운 게 아니었다. 아수라왕이 마음으로 천을 적이라 여기면 곧 다시 묶이고, 아수라이기를 그만두고 이곳에 살겠다 마음먹으면 그 즉시 저절로 풀렸다.

나는 이제 아수라를 좋아하지 않고, 지금부터 이 천궁에서 살리라.

이렇게 생각하자 결박이 스스로 풀렸다고 경은 적는다. 아수라를 가두는 건 바깥의 적이 아니라, 상대를 적으로 세우는 제 마음이었던 거다. 적의를 내려놓으면 풀리고, 다시 적으로 규정하면 묶인다.

그런데 시키나미에게 일어난 일은 이 풀림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다르다. 그녀는 적의를 내려놓은 게 아니다. 싸울 상대가 바깥에서 치워졌을 뿐이다. 신지 옆자리에 다른 사람이 들어서면서, 부딪힐 대상 자체가 사라졌다. 비마질다라는 스스로 천을 적이 아니라 여겨 밧줄을 풀었지만, 시키나미는 적을 적이 아니라 여긴 적이 없다. 다만 적이 눈앞에서 없어졌을 뿐. 그래서 그녀의 평온은 결박이 풀린 평온이 아니다. 잡을 상대가 없어 전투 태세가 갈 곳을 잃고 가라앉은, 그런 종류의 고요다. 적이 다시 나타나면 밧줄은 도로 살아날 것이다. 풀린 게 아니라, 쉬고 있을 뿐이니까.

풀린 게 아니라 거둬진 것 — 이제마

프로이트와 불교를 차례로 지나고 나면, 두 길이 한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게 보인다. 잃음에서 벗어나는 일도, 적의의 밧줄을 푸는 일도, 끝내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애도의 노동도 내가 하고, 적을 적이 아니라 여기는 것도 내가 한다. 그런데 시키나미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도 가벼워졌다. 이 어긋남을 끝까지 따라가 보려면 이제마를 한 번 펼치는 게 좋다.

이제마는 사람이 선다는 것을 「我身立局」 넉 자로 적었다(『격치고』). 내 몸이 한 덩이의 됨됨이로 굳어 선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이 굳음이 상대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굳는 것은 제가 본래 지녔어야 할 무언가를 스스로 놓아버렸기 때문이지,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다. 구판 아스카의 굳음도 그랬다. 신지가 그녀를 굳힌 게 아니라, 그녀가 이미 굳은 채로 신지와 부딪혔다.

그렇다면 부딪힐 상대가 사라졌다고 그 굳음이 풀릴까. 이제마라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부딪힘이 사라지면 그 굳음이 만들어내던 마찰만 잠시 멎을 뿐, 굳은 것 자체는 그대로 남는다. 다음에 부딪힐 자리가 열리면 같은 방식으로 다시 굳은 채 부딪힐 것이다. 굳음을 푸는 길은 따로 있는데, 그건 상대가 없어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거짓으로 흐르려는 마음이 막 일어나는 그 순간, 행하기 직전에 돌이켜 제자리로 떠오르는 것 — 이제마는 그것만을 풀림이라 불렀다. 부딪힘의 한복판에서, 스스로. 상대가 사라져 멈추는 것은 길에서 돌부리가 치워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시키나미의 고요는 이제마가 말한 그 풀림이 아니다. 그녀의 굳음은 풀린 게 아니라, 부딪힐 자리가 바깥에서 거둬져 가라앉은 것이다. 마리라는 인물을 떠올려 보면 이게 더 또렷해진다. 작품은 끝내 마리에게 두께를 주지 않는다. 과거도 내면도 거의 그리지 않고, 안경과 흥얼거리는 노래로만 떠다니게 둔다. 그건 실수가 아니라 마리의 역할이 한 인물이기보다 자리를 옮기는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가 마지막에 신지의 손을 잡고 역에서 데려가는 그 한 장면을 위해, 구판에서 신지 곁이던 아스카의 자리가 비워진다. 시키나미는 스스로 그 자리에서 걸어 나온 게 아니다. 그녀의 자리가 바깥에서 치워졌을 뿐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가장 묘한 솜씨가 있다. 화면 속 인물에게서는 풀림을, 그러니까 스스로 돌이켜 떠오르는 그 일을 면제해 버린다. 시키나미는 착해져서 푼 것도, 깨달아서 놓은 것도 아니다. 그냥 부딪힐 데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런데 작품은 바로 그 면제된 인물을 — 제 손으로 아무것도 풀지 않은 인물을 — 우리 앞에 살려서 멀찍이 세워둔다. 그리고 풀어내는 일은, 화면 밖의 우리에게 넘긴다. 인물에게서 거둬간 그 노동을, 관객에게 떠맡기는 것이다.

문턱으로 수렴하나 인물의 선만 직전에 떠오르고, 객석의 선만 통과하는 구조

보낸 것은 늘 객석이었다

그래서 같은 결말이 두 가지로 읽힌다. 아스카를 다른 남자 옆에 두고 신지를 다른 여자에게 보낸 것을, 누군가는 작가가 제 옛사랑을 멀리 치워버린 청산으로 본다. 누군가는 끝내 서로를 놓지 못하던 두 사람을 서로에게서 풀어준 해방으로 본다. 김빠진 복수로도, 담담한 자비로도 읽힌다. 그런데 이 두 독해는 사실 한 사실의 양면이다. 둘 다 부딪힘의 자리를 들어냈다는 한 가지에서 나온다. 그 자리를 거두면 누군가에겐 버림이고 누군가에겐 풀림이다. 그래서 이 글은 그중 하나로 닫지 않는다. 자리가 사라진 곳은, 보는 사람이 제 안에 무엇을 들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니까.

다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프로이트도, 불경도, 이제마도 끝내 같은 말을 했다. 보내는 일은 자기가 하는 것이라고. 그런데 겐도는 죽은 대상을 못 보내 굳었고, 구판의 아스카는 그 부딪힘을 못 보내 깨졌고, 신극장판의 시키나미는 보낼 일조차 바깥에서 거둬졌다. 셋 중 누구도 제 손으로 보내지 못했다. 보낸 것은 언제나 화면 밖이었다. 겐도를 보며, 구판 아스카를 보며, 그리고 끝내 시키나미를 보며 제 첫사랑을 보낸 것은, 늘 객석에 앉은 우리였다.

극장을 나서던 그 저녁이 가끔 떠오른다. 스무 살의 내가 그 부딪힘 안에 있었다면, 마흔 중반의 나는 그 부딪힘이 끝나는 걸 보고 있었다. 화면 속 아스카는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정작 무언가를 내려놓은 건 의자에 앉은 나였다. 무거운 걸 오래 들고 있다 내려놓으면 팔이 저 혼자 잠깐 떠오르는, 그런 가벼움. 후련하기보다 먼저 헛헛한, 그러나 분명히 가벼운.

첫사랑은 그렇게 끝나는 모양이다. 누가 죽어서도, 누가 미워져서도 아니고. 그냥 어디선가 잘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래서 피식 웃고, 조금 쓸쓸해지고,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