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데리러 온 여자 — 『에반게리온』 마키나미 마리

데리러 온 여자 — 『에반게리온』 마키나미 마리

· 최장혁· 마키나미 마리 일러스트리어스
목차

지난주에 안경을 새로 맞췄다. 검안 기계 앞에 턱을 얹으면 검안사가 렌즈를 딸깍딸깍 갈아 끼우며 묻는다. 1번이 잘 보입니까, 2번이 잘 보입니까. 대개는 답이 있다. 1번, 아니 2번, 다시 1번. 그런데 가끔 어느 쪽도 아닌 순간이 온다. 둘 다 또렷하거나, 둘 다 아니거나. 검안사는 당황하지 않는다. 표정 없이 다음 렌즈로 넘어간다. 기계에는 빈칸이라는 답도 준비되어 있는 모양이다. 누군가 미리, 어느 쪽으로도 안 떨어지는 눈이 있을 걸 알고 그 칸을 비워 두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 빈칸을 생각했다. 나는 두 달 가까이 『에반게리온』의 인물들에게 렌즈를 갈아 끼워 왔다. 프로이트로 보고, 융으로 보고, 이제마의 여덟 잠언으로 보았다. 누구는 첫 렌즈에서, 누구는 마지막 렌즈에서 초점이 맺혔다. 그런데 한 사람 앞에서 기계가 헛돌았다. 어느 렌즈를 끼워도 초점이 잡히지 않는 사람. 공교롭게도, 안경을 쓴 여자다.

마키나미 마리 일러스트리어스. 극장판 세 편이 전부 그녀의 콧노래로 열린다. 반쯤 죽은 행성의 하늘에서, 낡은 가요를 흥얼거리며, 그녀는 싸운다. 오래 헛돈다고 여겼는데, 버스에서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초점이 안 잡히는 게 그녀의 눈 때문이 아니라면. 검안 기계의 빈칸처럼, 누군가 미리 그 자리를 비워 둔 것이라면.

월요일의 교수대 — 프로이트

프로이트가 말년에 쓴 짧은 글이 하나 있다. 농담에 관한 두꺼운 책을 낸 지 이십 년도 더 지나서, 그는 유머라는 것을 다시 꺼내 들었다. 거기 나오는 예가 이렇다. 월요일 아침, 교수대로 끌려가던 죄수가 말한다.

Well, the week's beginning nicely.

이번 주는 시작이 좋군. 프로이트는 이 한마디를 방어라고 부르지 않았다. 승리라고 불렀다. 세계가 고통을 청구해 올 때 그 값을 지불하지 않겠다는 선언, 자아는 다치지 않는다는 의기양양한 주장. 그의 표현으로는 나르시시즘의 승리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출처를 그는 뜻밖의 자리에서 찾았다. 평소에는 혼내기만 하던 초자아가, 이때만은 겁먹은 자아를 어르는 어른이 되어 말해 준다는 것이다.

It is nothing but a game for children—just worth making a jest about!

그토록 위험해 보이는 이 세계는 애들 장난일 뿐이라고. 마리의 콧노래는 이 글의 삽화로 써도 될 정도다. 인류가 거의 지워진 행성, 괴물과의 백병전, 추락하는 기체. 그 안에서 그녀는 반세기 전 유행가를 부른다. 교수대 위의 월요일이 세 편 내내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이 설명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어딘가에 겁먹은 자아가 있어야 한다. 어르고 달래야 할 누군가가 안쪽에 웅크리고 있어야, 그 노래가 위로가 된다. 화면은 그걸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두려워하는 마리를,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처음엔 이걸 관측의 실패로 읽었다. 알맹이가 있는데 화면이 안 비춰 준 거라고. 그런데 다른 인물들을 떠올리면 이 침묵이 이상하다. 신지의 두려움은 세 편 내내 화면의 한복판이다. 아스카의 날 선 자존심도, 겐도의 굳은 슬픔도, 카메라가 집요하게 판다. 유독 마리에게만 카메라가 그 안쪽을 비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건 못 비춘 게 아니라 안 그린 것에 가깝다. 겁먹은 자아가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거기 그려지지 않은 것이다. 교수대의 유머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것인데, 마리는 이 이야기가 형(刑)을 선고하지 않는 인물이다. 신지도 아스카도 카오루도 목에 찼던 그 폭발 목줄을, 그녀만은 한 번도 차지 않았다. 렌즈가 헛도는 게 아니라, 여기 위로받을 자아가 그려져 있지 않다고 정확히 알려 주는 것이다.

구원자보다 먼저 오는 자 — 융

가명을 쓴다. 본명은 마지막 편에 가서야, 그것도 남의 입을 빌려 잠깐 불린다. 몸의 나이를 어딘가에 두고 왔고, 그 사연은 설명되지 않는다. 한쪽 진영에서 다른 진영으로 건너가고, 어느 쪽에도 눌러앉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별명을 붙인다. 멍멍이 군, 공주님. 위계라는 것을 장난감처럼 다룬다.

융이라면 이 목록을 보고 오래된 서류철 하나를 꺼냈을 것이다. 트릭스터. 신화의 변두리를 어슬렁거리는 그 형상을 두고 융은 연금술의 메르쿠리우스를 겹쳐 읽었다.

his fondness for sly jokes and malicious pranks, his powers as a shape-shifter, his dual nature, half animal, half divine

짓궂은 농담을 즐기고, 모습을 바꾸고, 반은 짐승이며 반은 신인 존재. 굳어 가는 질서를 뒤집어 놓고, 높은 자리에 앉은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 여기까지는 잘 맞는다. 그런데 융이 이 어릿광대에게 준 가장 뜻밖의 자리는 따로 있다.

He is a forerunner of the saviour

구원자보다 먼저 오는 자. 트릭스터 이야기의 끝자락에 구원자가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재앙이 이미 일어났고 누군가 그걸 정면으로 이해했다는 뜻이라고 융은 적었다. 신극장판의 끝에서 실제로 데리러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안다. 형태를 바꾸는 힘, 경계를 넘는 발, 구원자의 예감까지 정확히 겹쳐 놓고, 정작 한가운데 술어 하나가 뒤집혀 있다. 융의 트릭스터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다. 그는 무의식 그 자체다. 저도 모르게 부수고 저도 모르게 당하는, 아직 덜 여문 마음. 마리는 정반대다. 그녀는 이 이야기에서 거의 유일하게,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다. 겐도의 계획을 알고, 레이의 기원을 알고,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안다.

그런데 이 뒤집힘이야말로 실마리다. 저도 모르게 움직이는 트릭스터는 마음의 한 조각이다 — 누군가의 무의식이 저 혼자 튀어나온 것. 반대로 모든 걸 알면서 정확히 제자리에 오는 트릭스터는 마음의 조각이 아니라, 누군가 데려다 놓은 도구다. 무의식은 저도 모르게 오지만, 도구는 알고 온다. 트릭스터의 옷을 입었으되 무의식의 몸은 아닌 것. 융의 렌즈는 여기서 인물을 놓치고 그 위의 손을 짚는다. 마리를 움직이는 건 마리의 무의식이 아니라 마리를 쓴 사람의 의도다. 구원자보다 먼저 오는 자를, 안노는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게 아니라 이야기 밖에서 들여왔다.

칸에 앉지 않는 손 — 이제마

이제마는 사람과 사람이 맞닿는 자리를 여덟 칸으로 갈라 적었다. 내가 속이려 드는 네 자리와, 남이 나를 속이려 드는 네 자리. 힘이 있어 사람이 모이면 빼앗는 쪽으로 굴러가고, 재주를 뽐내면 공격이 돌아온다. 두 달 동안 이 격자는 잘 일했다. 겐도는 잃은 것을 움켜쥔 자리에, 미사토는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자리에, 카오루는 홀로 가서 이루는 자리에 앉았다. 열한 명이 열한 자리에 앉았고, 여덟 칸에는 남김없이 불이 들어왔다.

마리를 앉히면 좌표를 읽을 수가 없다. 그녀가 누구를 속이는 장면이 없고, 누구에게 속아 넘어가는 장면도 없다. 빼앗지도, 뽐내지도, 숨어서 챙기지도 않는다. 처음엔 이걸 격자의 한계로 여겼다. 여덟 칸이 못 담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그런데 이 격자가 재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되짚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여덟 칸은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게 아니다. 한 됨됨이가 다른 됨됨이와 맞닿아 굳는 그 순간의 기세를 잰다. 이제마는 사람이 선다는 것을 「我身立局」 넉 자로 적었다. 내 몸이 한 덩이의 됨됨이로 굳어 선다는 뜻이다. 여덟 칸은 그렇게 굳어 선 국(局)들 사이에서만 불이 들어온다.

마리는 굳어 서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녀는 굳어 서는 쪽이 아니라 굳어 선 것들을 옮기는 쪽이다. 판 위의 말이 아니라 판을 다시 놓는 손이다. 손은 칸에 앉지 않는다. 격자가 그녀 앞에서 빈칸을 돌려주는 건 격자가 고장 나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녀가 격자가 재는 종류의 것이 아니어서다. 안쪽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 그건 내가 판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그녀를 국으로 세우지 않고 국들을 옮기는 장치로 썼다는 것, 그것만은 화면이 말해 준다. 과거도 내면도 그리지 않고 안경과 콧노래로만 떠다니게 둔 그 얇음이, 실수가 아니라 용도인 것이다.

이제마가 이 격자를 적으면서 서문에 먼저 못박아 둔 문장이 있다.

形理之取象只是臆見 其象有八 非眞謂伏羲易象如此也

상을 취한 것은 다만 내 억견일 뿐이요 그 상이 여덟이 있을 따름이니, 복희의 역상이 정말 이러하다는 말이 아니다. 여덟 칸이 세계의 전부라고, 그는 말한 적이 없다. 격자를 만든 사람이 격자 밖을 먼저 열어 두었다. 그러니 여기 두 사람의 열어 둔 밖이 겹친다. 이제마는 서문에서 여덟 칸 밖을 열어 두었고, 안노는 그 열린 자리에 인물 하나를 놓았다. 한쪽은 격자가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적었고, 다른 한쪽은 격자에 앉지 않는 손을 만들어 이야기 안에 들여보냈다. 마리 앞에서 빈칸을 돌려주는 이 기계는, 고장 난 게 아니라 두 저자가 나란히 비워 둔 그 자리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격자 밖에서 한 일들은 남는다. Q에서 신지의 플러그를 강제로 뽑아 임팩트를 멈춘 것. 마지막에 그 목줄을 벗겨 준 것. 여덟 칸 안의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칸 안의 말은 다른 말을 옮길 수 없으니까. 판을 옮기려면 판 밖에 있어야 한다.

서는 곳마다 주인 — 불교

여기까지의 렌즈들은 전부 안쪽을 찾았다. 위로받아야 할 자아, 덜 여문 무의식, 굳어 서는 국. 안쪽을 전제하지 않고 사람을 읽는 법이, 내가 아는 한 하나 있다. 임제는 불법이 애써 공들일 곳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그저 평소에 일 없음이라고. 옷 입고 밥 먹고 피곤하면 눕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이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이 모두 참되어, 어떤 경계가 와도 바꿔치지 못한다. 마리는 어느 진영에서도, 달의 기지에서도, 세계가 뒤집힌 바다에서도, 에바가 사라진 거리에서도 늘 제집처럼 군다. 지킬 국이 없는 것은 빼앗길 국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잃은 것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면, 격자가 잴 것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태어난 게 아니라 놓인 것이라면, 결핍에서 출발할 까닭도 없다. 다른 렌즈들이 헛돌던 그 자리를, 이 오래된 어록은 결핍 없이, 안쪽을 묻지 않고 말해 준다. 서는 곳마다 주인인 것은 도(道)의 경지일 수도 있고, 애초에 자리를 옮기는 손의 속성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에서 그녀는 후자에 가깝다.

여덟 개의 차콜 사각형이 고리 모양으로 배열되어 각각 청록 점을 품고 있고, 오커색 선 하나가 고리 밖에서 들어와 중심의 점을 데리고 고리 밖으로 나가는 다이어그램

데리러 온 사람

마지막 장면은 실사로 찍은 역이다. 어른이 된 신지가 벤치에 앉아 있고, 그 목에는 목줄이 아직 남아 있다. 뒤에서 온 손이 그것을 벗긴다. 데리러 왔어, 하고 그녀는 말한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계단을 뛰어오른다.

그 손이 오려면 자리가 하나 비어 있어야 했다. 구판에서 신지 곁이던 자리, 아스카의 자리다. 신극장판의 아스카는 신지와 끝내 이어지지 않고 다른 남자 옆에서 어른이 되어 있다. 나는 그 아스카를 두고 한 번 쓴 적이 있다. 구판의 신지와 아스카는 서로를 못 놓고 부딪히다 같이 무너지는 멜랑콜리였는데, 신극장판은 그 첫사랑을 죽이지도 박제하지도 않고 살려서 남남으로 보냄으로써 그 굳음을 풀었다고. 다만 그 풀림을 수행하는 건 화면 속 인물이 아니라, 자기 스무 살을 떠나보내는 객석이라고. 작품은 인물에게서 스스로 보내는 그 일을 면제하고, 보내는 노동을 보는 사람에게 넘긴다.

그 면제가 가능하려면 누군가 아스카의 자리를 바깥에서 치워야 한다. 그 일을 한 손이 마리다. 아스카 쪽에서 보면 살아서 멀어진 첫사랑이고, 마리 쪽에서 보면 그 첫사랑의 자리를 비운 손이다. 한 동작을 양쪽에서 본 것뿐이다. 그리고 판 위의 어떤 말도 자기가 놓인 자리를 스스로 치울 수는 없으니, 그 손은 판 밖에서 와야 했다. 마리가 여덟 칸 어디에도 안 앉는 건 그래서다. 안노는 이 이야기를 스스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짜 놓고 — 인물들에게서 푸는 일을 면제하고 — 그 매듭을 밖에서 끊을 손 하나를 따로 만들어 들여보냈다. 칸에 앉는 손은 매듭을 못 끊는다. 끊으려면 칸 밖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 손이 여덟 칸 중 어느 칸에서 온 것이냐는 물음은, 처음부터 답이 없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잘못 짚은 물음이었다. 빈칸은 마리의 눈에 있던 게 아니다. 검안 기계의 그 빈칸처럼, 누군가 미리 비워 둔 자리에 있었다. 이제마가 서문에서 열어 둔 밖, 안노가 그 밖에 놓은 손. 데리러 온다는 건 그 손이 하도록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새 안경을 쓰고 나온 날처럼, 두 달을 들여다본 이야기가 잠깐 낯설게 또렷하다. 여덟 칸을 다 채우고도 끝내 한 칸이 비어 있었는데, 그 빈칸이 이야기의 구멍이 아니라 이야기를 밖에서 닫는 손의 자리였다는 것이.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