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떠나려고 온 남자 — 『에반게리온』 나기사 카오루

떠나려고 온 남자 — 『에반게리온』 나기사 카오루

· 최장혁· 나기사 카오루
목차

집 근처에 이십 년쯤 된 중국집이 있었다. 지난봄 그 집이 문을 닫았다. 마지막 영업일이라는 걸 나는 몰랐다. 늘 먹던 간짜장을 먹었고, 늘 하던 대로 계산을 하고 나왔다. 며칠 뒤 셔터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서야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뒤로 가끔 생각한다. 알았다면 그 한 그릇을 어떻게 먹었을까. 더 천천히 먹었을까. 주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했을까. 아마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다. 마지막인 줄 아는 채로 무언가를 제대로 치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의 마지막은 대부분 이렇게 온다. 지나고 나서야 소급해서 마지막이 된다. 마지막인 줄 알고 치르는 마지막은 드물고, 그 드문 것을 우리는 의식(儀式)이라 부른다. 그런데 여기, 처음부터 제 끝을 아는 채로 온 사람이 있다. 도착한 날 이미 떠날 날을 알고, 그 앎을 조금도 무겁게 들지 않는 사람. 『에반게리온』 스물네 번째 에피소드, 폐허가 된 호숫가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년. 나기사 카오루.

그는 이 작품에서 가장 늦게 도착해 가장 빨리 떠난다. 출연은 사실상 그 한 화가 전부다. 그런데 그 한 화가 주인공의 남은 생 전체에 얹힌다. 유이를 읽으며 나는 가장 적게 나오면서 가장 크게 있는 사람이라고 적은 적이 있는데, 카오루는 그 대칭이다. 유이는 머무르려고 사라졌고, 이 소년은 떠나려고 왔다.

함께 있으나 하나일 수 없는 — 융

카오루가 신지에게 온 방식부터가 이상하다. 만난 첫날, 아무 조건 없이, 호의를 말로 건넨다. 이 작품에서 신지에게 그렇게 한 사람은 없다. 다들 무언가를 시키거나, 무언가를 견디게 하거나, 무언가를 숨겼다. 카오루만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곁에 앉는다.

융의 전집 아홉 번째 권에 위기에 빠진 인간 앞에 나타나는 벗에 대한 글이 있다. 모세 앞에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그를 이끌던 키드르. 융은 그를 영혼의 내면의 벗이라 불렀다 — 우리 안에서 자라는 더 크고 넓은 인격이, 자연이 우리를 그리로 바꾸고 싶어 하는 그것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형상에 주석을 달았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자. 오래 사는 자. 제2의 아담과 유사한 자. 카오루는 세컨드 임팩트의 날에 태어났고, 인간이 아니고, 아담의 혼을 지녔다. 융의 문장이 반세기 뒤의 설정집처럼 읽히는 드문 경우다.

융은 같은 글에서 더 오래된 상 하나를 꺼낸다. 디오스쿠로이 — 하나는 필멸이고 하나는 불멸이어서, 늘 함께 있으나 결코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는 형제. 우리가 바로 그 한 쌍이라고 그는 적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그 벗이 벗이 될지 적이 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고. 열네 살의 필멸자와, 그의 손안에서 죽기를 청하는 불멸자. 이 구도가 융의 문장 위에 거의 그대로 얹힌다.

다만 융의 독법에는 서늘한 밑면이 하나 있다. 그 벗은 끝내 타인이 아니라는 것. 내 안에서 자라던 것의 상이라는 것. 그렇다면 신지가 그날 만난 것은 낯선 소년이 아니라, 자기를 있는 그대로 좋아해도 된다고 믿는 — 자기가 될 수도 있었던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그 손이 무엇을 쥐고 무엇을 놓았는지가, 여기서 한 겹 더 내려간다.

융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는다. 벗이 될지 적이 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신지에게 이 문장은 선택이 아니라 순서로 온다. 그는 카오루를 벗으로 만나, 적으로 통보받고, 제 손으로 죽인다. 벗과 적이 두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두 국면으로 오는 것 — 융이 내면의 벗에 대해 말한 가장 어두운 부분이 여기서 그대로 실연된다. 초호기의 주먹이 허공에 멈춰 있던 그 일 분의 정지 화면은, 필멸자가 제 안의 불멸자를 쥐고 있던 시간의 길이였는지도 모른다.

제 방식으로 죽는 — 프로이트

전쟁이 한창이던 해에 프로이트는 죽음에 대한 글을 하나 썼다. 거기 이상한 관찰이 있다. 사람은 자기 죽음을 상상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려 하면 어느새 자기가 관객으로 그 장면 곁에 남아 있음을 발견한다고. 그래서 무의식에서는 누구나 자기 불멸을 확신한다고. 죽음이 확실한 존재가 정작 죽음을 못 보고, 그 못 봄이 삶을 지탱한다는 것.

카오루는 이 관찰의 거울상이다. 죽지 않아도 되는 존재 — 인류가 끝나도 살아남을 쪽 — 가 제 죽음만을 정면으로 본다. 관객석이 없다. 그는 제 죽음의 장면에 배우로만 서 있고, 그 장면을 미리 다 보고 온 사람처럼 담담하다.

프로이트는 몇 년 뒤 더 멀리 간다. 쾌락원칙을 넘어서 — 생명은 저마다 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갖고 있으며, 자기보존 본능이란 그 길 밖의 죽음을 막아서는 파수꾼일 뿐이라고. 유기체는 오직 제 방식으로만 죽으려 한다. 삶의 수호자들이 원래는 죽음의 심부름꾼이었다는 역설.

카오루의 마지막이 정확히 이 문장 위에 있다. 그의 죽음은 예정돼 있었다. 시나리오가, 조직이, 그의 존재 자체가 그 죽음을 적어두었다. 그가 바꾼 것은 죽음의 유무가 아니라 방식이다. 남의 손에 처형되는 대신, 제가 고른 한 사람의 손에, 제가 고른 이유로. 자기 의지로 죽음을 고르는 것이 유일한 절대의 자유라던 그의 말은, 프로이트의 언어로 옮기면 필연에 대한 진술이 된다. 같은 사실을 한쪽은 자유라 부르고 한쪽은 본능이라 부른다. 어느 쪽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 두 이름 사이의 거리가, 이 소년이 인간과 벌려 선 거리처럼 보인다.

세 번째 무아 — 불교

이 시리즈에서 무아(無我)라는 말을 꺼내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레이를 읽을 때 나는 아직 밝지 않은 불을 봤다. ‘나’라는 불이 또렷이 타오른 적 없는, 발생 이전의 흐릿함. 유이를 읽을 때는 그 반대편을 봤다. 또렷이 선 사람이 제 자리를 스스로 풀어 모두의 바탕이 된 — 그러나 닫지 않아서, 불교가 자비라 부른 그 자리를 이제마가 가장 깊은 굳음이라 되받던 역설. 그리고 레이 글의 끝에 이렇게 적어두었다. 레이가 무아의 시작이라면, 뒤에 올 카오루는 무아의 끝이라고. 이제 그 문장을 결제할 차례다.

카오루는 이 작품에서 벽을 처음으로 벽이라 부른 사람이다. AT필드 — 사도를 막는 병기의 이름으로 불리던 그것에, 그는 누구나 가진 마음의 벽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남들은 그 벽 안에서 태어나 벽을 공기처럼 여기는데, 벽 바깥에서 온 그만이 그것을 벽으로 본다. 다만 보는 것과 요구하는 것은 다르다. 그는 신지의 벽을 허물라고 말하지 않는다. 벽 너머로 손을 뻗지도 않는다. 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봐 주고, 벽이 있는 채의 소년을 좋아한다고 말할 뿐이다.

벗에 대해서라면 잡아함에 이런 문답이 있다. 아난다가 좋은 벗을 사귀는 것은 청정한 삶의 절반쯤 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붓다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한다.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나는 모든 중생의 좋은 벗이어서,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라고. 좋은 벗은 길의 동반자가 아니라 길 그 자체라는 말이다. 신지에게 카오루가 꼭 그랬다. 다만 방향이 뒤집혀 있다. 붓다의 벗은 사람을 죽음에서 꺼내주는 벗이고, 카오루는 제 죽음으로 건네주는 벗이다.

그래서 무아의 끝이라는 말은 조심스럽게 써야 한다. 그는 무아를 설법한 적이 없다. 그가 한 일은 두 가지다. 남의 ‘나’를 흔들지 않은 것. 그리고 마지막에, 모두의 벽을 녹일 수 있는 자리에서 — 그 문의 열쇠를 쥔 채로 — 제 쪽의 막만 닫은 것. 무아의 완성태로 보내진 존재가, 정작 마지막 선택으로는 타인의 ‘나’를 지키고 자기라는 막을 거둔다. 레이의 무아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이었고 유이의 무아가 끝내 닫히지 못한 것이었다면, 카오루의 무아는 스스로 닫은 것이다. 시작과 미완과 완성. 세 꼭짓점이 여기서 닫힌다.

다만 닫히면서 물음이 하나 남는다. 완성된 무아는 왜 이 작품의 답이 되지 못했는가. 그 물음을 받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십구 세기 끝자락, 함경도의 의사다.

홀로 가되 속이지 않는 — 이제마

이제마의 격치고에는 여덟 개의 잠언이 있고, 그 첫머리에 乾이라는 이름이 붙은 잠언이 선다. 홀로 가서 능히 이루는 것은 속이지 않음이다 — 獨往能成不爲誑. 때가 놓인 곳에서는 반드시 때를 살피고, 권세가 놓인 곳에서는 반드시 권세를 살피고, 지위와 이익이 놓인 곳에서도 그리하라고, 그리고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 잠언은 적는다. 이제마가 겨냥한 것은 성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다. 홀로 무언가를 이룰 힘이 생긴 자리에서 사람은 반드시 속임의 물살 위에 놓인다는 것. 물살을 먼저 알고, 살피라는 경계다.

카오루가 놓인 자리가 정확히 그 자리다. 그는 속임수로 설계된 존재다. 조직이 그를 파일럿의 얼굴로 들여보냈고, 그의 임무 자체가 위장이었다. 때도 권세도 지위도 이익도 — 세계의 끝을 열 수 있는 열쇠라는 지위 — 전부 그의 손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살폈고, 속이지 않았다. 신지에게 저를 숨기지 않았고, 마지막 문 앞까지 내려가 제 눈으로 확인했고, 확인한 뒤 그 열쇠를 돌리지 않았다. 홀로 갔고, 이뤘고, 속이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잠언의 네 구절을 이렇게 문자 그대로 채운 인물을 나는 이 시리즈에서 처음 본다.

이제마에게는 사람이 굳는 방식의 목록도 있다. 예를 버리고 방종하는 자, 의를 버리고 안일로 달아나는 자, 지혜를 버리고 제 사사로움을 꾸미는 자, 어짊을 버리고 욕심을 끝까지 미는 자. 넷 다 무언가를 버려서 굳는다 — 덕 하나를 내주고 ‘나’를 지키는 거래다. 카오루는 이 목록의 바깥에 있다. 그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버린 것이 있다면 ‘나’ 그 자체다. 덕을 버려 나를 지키는 사람들의 세계에, 덕을 다 쥔 채 나를 내려놓는 자가 하나 왔다 간 것이다.

유이를 읽을 때 나는 이제마가 자기를 바치는 죽음에 거는 조건을 셋으로 간추린 적이 있다. 이룰 것이 분명할 것. 다른 길을 정말 다 더듬어봤을 것. 그리고 죽음으로 닫힐 것. 유이는 세 번째가 없어서, 가장 큰 사랑이 가장 단단한 굳음으로 남았다. 카오루는 셋을 다 채운다. 하나만 살 수 있는 갈림에서 이룸이 분명했고, 마지막 문 앞까지 내려가 다른 길이 없음을 제 눈으로 확인했고, 죽음으로 닫았다. 이 시리즈를 통틀어 살신성인의 형식을 온전히 갖춘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바로 그 완전함이 걸린다. 이제마는 여덟 잠언의 첫머리에 제 얘기를 적어두었다. 어려서부터 늙도록 속이려는 마음이 끝이 없어, 거듭 돌아오고 거듭 잃으며 — 屢復屢失 — 스스로를 경계해왔다고. 쉰일곱이 되어서도 아직 그 마음을 잊지 못한다고. 그가 사람의 길이라 부른 것은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이 끝없는 되돌아옴이다. 넘어질 수 있는 자만이 되돌아올 수 있고, 속을 수 있는 자만이 살필 것이 있다. 잠언이란 그런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카오루에게는 그게 없다. 그는 단 한 번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성했다. 완성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이 잠언의 독자가 아니라는 표지다. 굳을 국이 없는 자에게는 되돌아올 자리도 없다.

신극장판의 카오루가 이 독법의 방증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거기서 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소년에게 돌아오고, 몇 번이고 같은 자리에서 실패한다. 행복하게 해주겠다던 약속은 번번이 반대의 결과로 끝난다. 거듭 돌아오고 거듭 잃는 — 이제마가 제 쉰일곱 해를 요약한 바로 그 꼴이 되어서야, 이 존재는 비로소 인간의 형식에 다가선다. 완성은 신의 것이고, 되돌아옴이 사람의 것이다.

왼쪽에는 한 번에 닫힌 오커색 원 하나, 오른쪽에는 같은 차콜 점으로 몇 번이고 되돌아오지만 끝내 닫히지 못하는 청록 고리들이 겹쳐 있는 다이어그램

선택되지 않은 해답

레이 글의 끝에 적었던 문장에는 뒷부분이 있다. 무아의 시작과 끝, 둘 다 끝에 가서 선택되지 않는다는 것. 카오루는 완성된 해답으로 왔지만, 작품은 그 해답을 고르지 않는다. 모두의 벽이 녹은 자리에서 소년은 메스꺼움을 느끼고 벽을 도로 세운다. 완성은 아름다웠고, 선택된 것은 미완이었다.

이것이 그의 잘못도 실패도 아니라는 것은 적어둬야겠다. 그의 완성은 그가 인간이 아니어서 가능했던 형식이다. 사람의 자리에서 그 형식만 떼어 흉내 내면,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죽음뿐이다. 이제마가 유이의 자리를 두고 했던 말이 여기서는 더 무겁게 돌아온다. 길로 삼을 것이 못 되고, 흉내 내면 굳을 뿐이라고.

그가 남긴 것은 해답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미사토 앞에서 신지가 울면서 말한다. 카오루는 좋아한다고 말해줬다고. 처음이었다고. 아버지에게도, 누구에게도 들은 적 없는 말. 무아도 자유도 아닌, 그 한마디가 남았다. 소년은 그 말을 쥐고 남은 생을 건너게 된다 — 거듭 넘어지고 거듭 돌아오면서. 그 이야기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자리에 남겨둔다.

그 중국집 앞을 요즘도 지나다닌다. 셔터는 내려져 있고, 안내문은 빛에 바래 글자가 흐려졌다. 마지막인 줄 알고 먹는 한 그릇 — 나는 그게 안 되는 사람이고, 아마 대부분 그럴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을 늘 놓치고, 놓친 자리로 몇 번이고 되돌아오는 방식으로만 무언가를 치른다. 처음부터 끝을 알고 와서 그 끝을 제 손으로 닫고 간 소년의 이야기를, 그래서 나는 부러움 없이 읽는다. 그는 우리가 못 하는 것을 했고, 우리는 그가 못 하는 것을 한다. 넘어지고, 돌아오고, 내일 또 같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 지리멸렬이 우리 몫의 자유다.

— 최장혁 —


이 인물을 두 사람의 대화로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