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굳지 않은 남자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오카다 토오루

굳지 않은 남자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오카다 토오루

· 최장혁· 오카다 토오루

스파게티를 삶다가 이 남자를 다시 떠올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면을 넣고, 시계를 보고, 김이 천장으로 흩어지는 걸 멍하니 본다. 오카다 토오루도 꼭 그렇게 시작했다. 다니던 법률 사무소를 그만두고, 아내의 블라우스를 다리고, 사라진 고양이를 찾고, 끓는 냄비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라카미의 남자들은 대개 이 자리에서 멈춘다. 무언가를 잃고, 그 자리를 오래 견디고, 끝내 못 건넌 채로 이야기가 닫힌다. 와타나베도 그랬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나’도 그랬다.

그런데 토오루는 건넜다. 그는 빈집 마당의 마른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 어둠 속에 며칠을 앉아 있었고, 어느 순간 벽을 통과해 저편의 방으로 들어갔고, 사라진 아내를 향해 끝까지 걸어 들어갔다. 융이라면 이걸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정해진 구덩이로 무심코 내려가 그 어둠에서 빛이 솟는 일. 자기 안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통과한 사람만이 앞으로 나아간다던, 그 과정. 무라카미를 이십 년 넘게 읽어오면서 나는 토오루만큼 그 도식을 끝까지 밟는 인물을 달리 떠올리지 못한다. 그래서 한동안 이 글을 거기서 끝낼 생각이었다. 끝까지 내려갔다 멀쩡히 돌아온 남자, 라고.

그런데 그 깔끔함이 걸렸다. 융이 이렇게 잘 맞으면 오히려 의심해봐야 한다. 같은 남자를 다른 사람들 앞에 세우면 뭐라고들 할까. 프로이트라면, 붓다라면, 그리고 직업상 자꾸 펼치게 되는 이제마라면.

융이 연 길, 그 길 끝의 빈자리

융의 지도 위에서 토오루는 모범생에 가깝다. 그는 무의식의 힘을 의지로 끌어내려 하지 않는다. 우물 바닥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기다리는 것뿐이다. 융이 관조적 태도라 부른 그것 — 무엇이 일어날지 억지로 캐묻지 않고, 어둠이 스스로 말을 걸어올 때까지 잠잠히 머무는 자세다. 그러는 사이 그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아내의 오빠, 와타야 노보루. 매끄러운 언변으로 텔레비전과 정치판을 사로잡는 남자, 토오루가 가진 모든 것의 정확한 반대편에 선 남자다.

우물에서 나온 토오루의 오른뺨에는 갓난아이 손바닥만 한 검푸른 반점이 돋아 있다. 그리고 그는 부유한 모자(母子), 넛메그와 시나몬의 저택에서 기묘한 일을 시작한다. 어두운 방에 수영용 고글을 쓰고 앉아 있으면 여자들이 다가와 그 반점을 만지고 핥는다. 그때 토오루는 자신의 의식을 몸에서 분리해 스스로를 ‘빈집’으로 만든다. 그렇게 비운 자리로 여자들 내면의 정체 모를 멍울을 받아 풀어준다. 일종의 치유사다. 융이라면 여기서 마나 인격을 보았을 것이다 — 무의식을 통과한 자에게 깃드는 주술사·치유사의 원형. 그리고 곧바로 경고했을 것이다. 위험하다고. 무의식의 힘을 제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자아는 부풀어 올라 텅 빈 초인이 된다고. 영웅은 심연에서 보물을 얻고도 그 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도리어 괴물에게 삼켜진다고.

토오루는 그 문턱까지 간다. 그러나 먹히지 않는다. 결말에서 반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융의 언어로 옮기면, 그는 힘에 사로잡히지 않고 통과를 완료한 것이다. 세상을 제 안으로 끌어안아 온전해지는 일, 그게 개성화라면 토오루는 해냈다 — 여기까지는.

그런데 길 끝이 비어 있다. 융의 개성화에서 핵심은 아니마, 즉 내면의 여성상을 구원해 자기 안에 통합하는 일이다. 그 아니마가 쿠미코다. 토오루는 그녀를 향해 우물 끝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쿠미코는 통합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다. 융은 토오루가 밟은 단계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지만, 정작 그 끝에서 왜 아니마가 빈손으로 떠나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도식은 완주됐는데 약속된 보상이 없다. 토오루는 길을 다 걸었는데, 그 길 끝에 아무도 없다.

프로이트가 뒤진 토오루의 안, 그러나 답은 거기 없다

프로이트는 우선 ‘완성’이라는 말부터 지운다. 그에게 토오루의 여정은 자기실현 같은 게 아니다. 잃어버린 대상에 묶여 있던 에너지를 현실이 거둬들이라 명령하고, 사람은 그걸 한 번에 놓지 못해 기억 하나하나에 매달렸다 떼어내기를 되풀이한다. 애도란 그런 것이다 — 도덕적 완성이 아니라, 에너지의 수지를 맞추는 지난하고 기계적인 처리. 우물 속의 그 긴 시간은 영혼의 단련이 아니라, 빠져나갈 곳을 못 찾은 리비도가 자아 안쪽으로 철수해 들어앉은 멜랑콜리의 풍경이다.

그리고 노보루가 있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그는 처남이기 전에 형(兄)이다. 누이를 차지한 손위 남자. 사내아이가 그 자리의 남자에게 품는 것은 경쟁을 넘어선 죽음 소망이다. 토오루가 벽 너머의 어둠 속에서 야구방망이를 내리칠 때, 그와 동시에 현실의 노보루는 사무소에서 두개골이 함몰되어 쓰러진다. 융은 이것을 그림자의 통합이라 불렀지만, 프로이트는 훨씬 건조하게 말한다. 오래 억눌려 있던 증오와 사디즘이 마침내 제 방향을 찾았을 뿐이라고. 거기에 무슨 구원이 있는 게 아니다. 에너지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렀고, 장부는 그렇게 맞춰졌다. 토오루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빚을 갚았다.

그런데 프로이트도 막힌다. 그는 토오루의 안을 샅샅이 뒤지지만, 정작 중요한 물음 앞에서 멈춘다. 왜 토오루의 사랑은 — 결혼이라는 그 자리는 — 노보루의 지배를 못 이겼는가. 쿠미코는 결혼을 하고도 오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 몰래 셀 수 없는 남자들과 잤고, 나중에야 그것이 “오빠가 내 안의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간” 탓이었다고 고백한다. 토오루의 끈은 왜 그 어두운 끈보다 약했나. 프로이트는 토오루 한 사람의 욕동을 다 헤아리고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답이 토오루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사람 안의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깔린 어떤 장(場)의 문제다.

붓다는 너무 멀리서 본다

여기서 잠깐, 다른 목소리를 들어볼 만하다. 붓다라면 이 모든 걸 한 발 물러나 바라봤을 것이다.

토오루는 ‘쿠미코를 찾는다’고 믿고 내려갔다. 그런데 쿠미코를 찾는다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능엄경에 연야달다라는 사내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다 제 머리가 사라진 줄 알고 미쳐서 거리를 헤매며 머리를 찾아다닌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헛것을 제 잃은 머리로 착각하고 광분했을 뿐이다. 찾을 ‘나’가 애초에 없는데 찾으러 나섰다면, 토오루가 통과한 우물도 벽도 전부 피로한 눈이 허공에서 본 헛꽃이 된다. 그가 치유했다는 여자들의 멍울도, 그 멍울을 풀었다는 ‘빈집’의 능력도, 실체 없는 상(相)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가 힘을 쓰는 방식이 바로 자기를 비우는 것, 곧 무아(無我)였다는 게 서늘하다. ‘나’를 찾아 그토록 헤맸는데 정작 능력은 ‘나’를 비울 때만 나왔으니.

날카로운 칼이다. 그런데 너무 멀리서 휘둘러진다. 모든 것이 환이라면 노보루의 지독한 폭력과 토오루의 묵묵한 견딤도 같은 환이 되고, 쿠미코가 굳은 것과 토오루가 굳지 않은 것의 차이마저 공(空) 속으로 녹는다. 그 차이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데도 그렇다. 붓다의 눈은 너무 높은 데 있어서 정작 그 차이를 놓친다. 그래서 오래 머물 수 없다. 한 번 서늘하게 베이고, 다시 땅으로 내려온다.

이제마 — 피해자도 가해자도 없는 자리에서

프로이트가 못 푼 것, 붓다가 지워버린 것을 이제마가 받는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백수십 년 전 함경도에서 사람의 성정을 들여다본 이 의원의 글이, 도쿄의 마른 우물에 가장 깊이 닿는다.

이제마가 만년에 남긴 『격치고』를 펼치면 局·場·面이라는 세 겹의 흐름이 나온다. 局은 사람마다 타고나 몸에 밴 형세이고, 場은 두 局이 부딪쳐 생기는 관계의 공간이며, 面은 그 둘이 맞닿아 끊임없이 모양을 바꾸는 살아 있는 막이다. 이제마의 세계엔 고체가 없다. 사람도 관계도 전부 흐른다. 그가 한 가장 무서운 말은 이것이다. 악은 실체가 아니라 응고(凝固)다. 나쁜 사람이 따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같은 물이 흐르다 한자리에 고여 굳으면 그것을 비(鄙)·박(薄)·탐(貪)·나(懦)라 부른다는 것. 산속에서는 샘물, 강가에서는 강물, 바다에서는 바닷물 — 이름만 다를 뿐 같은 물이다.

이 눈으로 보면 노보루와 토오루는 거울상이다. 두 사람은 한 여자를 공유한다. 한쪽은 누이로, 한쪽은 아내로. 사회적으로 한쪽은 정점으로 오르고 한쪽은 바닥으로 내려간다. 한쪽은 말로 세상을 사로잡고 한쪽은 침묵으로 우물에 들어간다. 한쪽은 위로 부풀고 한쪽은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사람 다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힘을 지녔다. 노보루는 들어가 무언가를 꺼내가고(쿠미코의 서랍을 열듯), 토오루는 빈집이 되어 받아 풀어준다. 같은 능력의 음화와 양화다. 모든 축에서 둘은 정확히 마주 선다. 거울이 둘을 비춘다는 건, 둘이 같은 재료라는 뜻이다. 차이는 본질이 아니라 방향이다. 같은 場 위에서 노보루는 그 힘에 올라타 굳었고, 토오루는 굳지 않았다.

『격치고』의 팔괘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게 강한 힘이 있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내게 다가오고, 그러면 나는 반드시 빼앗는 자가 된다(我有强力 人必趁我 我必行奪). 매 구절에 ‘반드시(必)‘가 두 번씩 박혀 있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필연이다. 나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리가 나쁜 역할을 배정한다. 노보루는 그 힘에 올라타 굳어버린 局이고, 굳은 局의 안공(眼孔)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역할로만 본다. 그래서 그는 죽은 누이가 자살로 빠져나간 자리에, 누이가 맡던 역을 다시 쿠미코에게 이어 붙인다. 같은 면을 무한히 다시 찍어내는 굳은 판화처럼.

여기서 우리는 노보루를 단죄하고 싶어진다. 쿠미코를 동정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격치고는 그 손을 붙잡는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따로 없다고. 이제마는 비박탐나를 남 얘기로 적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두고 “어려서부터 늙도록 속이려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고 쓴 사람이다. 그는 자기까지 그 흐르는 물 속에 던져 넣었다. 노보루도 쿠미코도 토오루도 같은 場 위에 선 같은 물이다. 누가 더 깨끗하고 누가 더 더럽다는 판정을 멈추고, 물이 어디서 고이고 어디서 흐르는지를 볼 것 — 그게 이 의원이 가르친 보는 법이다.

굳지 않은 남자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오카다 토오루

場과 싸우지 마라

그렇다면 쿠미코는 노보루를 죽임으로써 그 지긋지긋한 場을 벗어났는가.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이 이야기의 가장 차가운 진실이다. 場은 노보루라는 사람이 아니다. 노보루는 그 場이 굳어 떠오른 하나의 면일 뿐이다. 면 하나를 부순다고 場이 사라지지 않는다. 더 깊이 보면, 쿠미코가 그를 죽이는 그 행위 자체가 이미 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녀는 노보루를 죽이러 가면서 그 작별의 메시지를 다름 아닌 노보루의 사무소 컴퓨터에서 보낸다. 끝까지 그의 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죽인 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자유가 아니라 감옥이다. 한 가둠에서 다른 가둠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그녀는 면회도 석방도 거부하고 그 안에 조용히 있겠다고 한다.

격치고의 눈으로 보면, 죽임은 場을 벗어나는 길이 아니라 場에 가장 깊이 먹힌 증거다. 場을 이기는 길은 면을 부수는 게 아니라 — 그건 또 하나의 행사(行詐)일 뿐이다 — 굳기 전에 다른 상(相)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마는 그것을 반성(反誠)이라 불렀다. 굳은 길을 거슬러 다시 착해지는 게 아니라, 굳기 직전에 다른 결로 슬쩍 증발하듯 떠오르는 것. 도달점이 없고, 매번 출발 자리로 돌아오는, 멈추지 않는 운동이다. 쿠미코는 증발하지 못했다. 그녀는 場이 준 폭력을 場의 문법 그대로 되돌려줬다. 노보루가 죽은 누이의 역을 그녀에게 이어 붙였듯, 그녀도 노보루의 폭력을 이어받아 그를 죽인다. 거울은 깨도 비친 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깬 사람이 그 상을 닮을 뿐이다.

토오루는 다른 길을 갔다. 그는 場과 싸우지 않았다. 노보루를 찾아가 정면으로 부수려 들지 않았다. 우물 바닥에 가만히 앉았고, 자신을 빈집으로 비웠고, 안공을 잃지 않은 채 통과했다. 그가 벽 너머에서 방망이를 휘두른 그 순간조차, 능동적인 공격이라기보다 그를 통과해 場이 흐른 사건에 가깝다. 그는 굳지 않았기에 그 힘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치유사라는 역을 받으면서도 자신을 빈집으로 비워, 그 역이 자기를 굳히지 못하게 했다. 반점을 손에 쥐려 하지 않았기에, 자리가 닫히자 반점도 제 발로 빠져나갔다. 이제마가 말한 국면장의 생존법 그대로다. 동화된 척하되 흡수되지 않고(安恭), 이긴 순간이 가장 위험하니 거기서 굳지 않고(勿忘勿助長), 가시성을 낮춰 살아남는 것(不得已). 토오루는 場을 이긴 게 아니다. 場에 굳지 않은 채 빠져나왔을 뿐이다.

굳지 않았다는 것, 그 하나

그러니 이 이야기에 구원은 없다. 구해진 사람도, 구한 사람도 없다.

쿠미코는 토오루를 통해 구원받지 못했다. 결혼은 그녀를 오빠에게서 꺼내지 못했고, 끝내 그 매듭을 끊은 것도 토오루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손이었으며, 그 손은 그녀를 자유가 아니라 감옥으로 데려갔다. 토오루는 우물 끝까지 내려갔으나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그는 융이 그린 단계를 빠짐없이 밟았지만, 그 끝에서 아니마는 통합되지 않고 떠났다. 손에 남은 보물은 없다. 반점도, 능력도, 아내도.

노보루도 쿠미코도 토오루도 같은 場 위에 선 같은 물이었고, 다만 흐른 방향이 달랐을 뿐이다. 쿠미코는 場과 싸웠고 — 오빠를 죽임으로써 — 더 깊이 굳어 갇혔다. 노보루는 場의 힘에 올라타 진작에 굳어 있었다. 토오루는 싸우지 않았다. 자신을 비우고, 굳지 않은 채 흘러나왔다. 그는 이기지 않았다. 다만 살아남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재회도, 복수의 완성도, 깨달음의 빛도 아니다. 토오루는 가사하라 메이를 만나고 헤어진 뒤 기차에 올라, 그 어떤 곳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먼 자리에서 아주 잠깐 잠이 든다. 場은 끝내 그대로 있고, 반점은 제 발로 왔다 갔고,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진 것은 단 하나, 굳지 않았다는 것. 그는 빈집에 돌아가 쿠미코를 기다리기로 하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짓는다. 코르시카, 라고.

어쩌면 사람이 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이기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좋은 사람이 되어 악을 무찌르는 것도, 모든 게 헛것임을 깨닫고 초연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굳지 않는 것. 싸워서 면 하나를 부수려다 더 깊이 굳어버리는 대신, 자신을 지키며 유연하게, 굳기 전에 매번 다시 떠오르며, 그렇게 살아남는 것. 끓는 물 앞에 우두커니 선 그 평범한 남자가 끝내 보여준 것은 그 하나였다. 나는 그게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