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달아날수록 따라오는 아이 — 『해변의 카프카』 다무라 카프카

달아날수록 따라오는 아이 — 『해변의 카프카』 다무라 카프카

· 최장혁· 다무라 카프카

밤 버스 정류장에서 제 몸보다 큰 배낭을 멘 남자아이를 본 적이 있다. 열대여섯쯤. 배낭이 어찌나 무거운지 한 번에 못 메고, 무릎에 올렸다가 반동을 줘서 등에 걸쳤다. 끈을 조이는 손이 야무졌다. 누가 봐도 멀리 가는 짐인데, 표정은 산책 나온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애쓰는 무표정이 오래 남았다.

가출은 멀리 가는 일이라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가출하는 아이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두고 온 집이 아니라, 배낭 안에 같이 넣어 온 무언가일 때가 있다. 아무리 멀리 가도 그건 같은 무게로 등에 있다.

다무라 카프카는 열다섯 생일에 집을 나선다. 아버지가 오래전에 박아 둔 한 문장 —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이를 범하리라 — 그 문장으로부터. 어머니는 그가 네 살 때 누이만 데리고 사라졌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두 개의 짐을 메고 떠난다. 받은 적 없는 작별과, 받기 전에 이미 받아 버린 저주.

나는 진료실에서 무거운 것을 등에 진 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래서 이 아이가 남 같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봤다.

프로이트라면 — 운명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프로이트라면 이 예언을 외부에서 날아온 화살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표준판 어딘가에서, 오이디푸스 왕이 우리를 그토록 사로잡는 이유는 신탁이 가혹해서가 아니라 그 신탁이 이미 우리 안에 있던 것을 건드리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운명이라는 고상한 말은, 무의식이 차마 제 것이라 말하지 못하는 소망을 밖으로 던져 만든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썼다. 아마 우리 모두의 첫 번째 사랑은 어머니에게로, 첫 번째 미움은 아버지에게로 향했을 것이라고. 오이디푸스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어린 시절 소망이 무대 위에서 실현된 것을 보여줄 뿐이라고.

그렇게 읽으면 아버지가 내린 저주가 그토록 들러붙는 까닭이 보인다. 그게 순전한 바깥의 형벌이라서가 아니라, 아이가 이미 품은 무언가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달아나는 것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처럼 보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달아날수록 따라오는 건, 등에 진 것이 결국 자기 안의 것이어서다. 발이 빠를수록 그림자는 더 바싹 붙는다.

네 살의 상실은 또 다른 자국을 남긴다. 사랑하던 대상이 사라지면, 그쪽으로 갔던 마음이 안으로 거둬지고, 아이는 떠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 그를 제 안에 다시 세운다. 프로이트는 이를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로 떨어진다"고 했다. 어머니의 부재가 자아의 한 귀퉁이에 영구히 박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자라는 우울은 슬픔의 얼굴이 아니라 자책의 얼굴로 온다. 떠난 건 그 사람인데 못난 건 나라고 말하는, 그 이상한 산수.

카프카가 스스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열다섯이 되라고 명령하는 장면은, 그래서 강함의 이야기가 아니다. 떠나보냄을 당하기만 한 아이가, 이번엔 제 손으로 떠남을 연출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오래 들여다본 그 어린아이 — 실패를 던졌다 당겼다 하며 어머니의 사라짐과 돌아옴을 혼자 반복하던 아이 — 처럼, 카프카는 당하는 자리에서 하는 자리로 옮겨 앉으려 가방을 멘다. 무표정하게 끈을 조이던 그 야무진 손이 여기 있다. 강해지려는 게 아니라, 더는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융이라면 — 까마귀라는 두 번째 목소리

카프카에게는 까마귀라고 불리는 소년이 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타나 그를 떠밀고, 가라앉히고, 더 단단해지라고 말하는 목소리. 처음 읽을 땐 그저 상상 속 친구처럼 보이지만, 융이라면 다르게 불렀을 것이다. 자율적 콤플렉스. 자아의 통제를 벗어나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쪼개져 나온 또 하나의 인격.

융은 여동생을 찌른 한 소년의 사례를 두고,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다가온 환영을 “그를 파멸로 몰고 간 제2의 자아의 상징"이라 적었다. 자아의 밝은 쪽에서 밀려난 어둡고 열등한 부분 — 그가 그림자라 부른 것 — 이 감정의 열을 받으면 자라나 별개의 목소리가 된다. 카프카의 까마귀는 그 그림자가 입을 얻은 형상이다. 흥미로운 건, 까마귀가 늘 악역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떠밀기도 하지만 지켜 주기도 한다. 융이 거듭 경고한 대로, 그림자를 못 본 척하면 사람은 안팎으로 크게 상한다. 카프카가 무너지지 않은 건 그 어두운 목소리를 등지지 않고 데리고 다녔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숲이 있다. 카프카는 이야기의 어느 지점에서 깊은 숲으로 걸어 들어가 이 세계의 가장자리를 넘는다. 융이라면 이것을 그저 길을 잃는 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하강을 두고, 목적 없는 추락이 아니라 의미 있는 동굴로의 내려감이라고 했다. 죽은 듯 잠긴 마음의 에너지가 그 어둠 속에서 새로 깨어나는, 일종의 밤바다 건너기. 카프카가 숲에서 만나는 것들 — 시간이 멈춘 마을, 떠난 자들의 형상 — 은 바깥 풍경이 아니라 제 안으로 내려간 사람이 보는 풍경에 가깝다.

그 내려감의 끝에 융이 개성화라 부른 것이 있다. 그는 그것을 거창한 완성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예외 없이 자기 그림자를 마주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적었다. 카프카가 숲에서 돌아 나올 때 무엇이 해결된 건 아니다. 다만 그는 자기 안의 어두운 목소리와 한 번 정면으로 마주 앉았고, 그 마주 앉음 이후의 사람은 그 이전과 미세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

사상심학이라면 — 끓어 넘친 마음

이제마는 마음이 한쪽으로 극단까지 가면 몸을 벤다고 적었다. 哀極不濟則忿怒激外. 슬픔이 끝까지 차서 풀리지 못하면 분노로 밖에 터진다는 말이다. 그는 그렇게 한 번 크게 흔들린 마음은 칼로 장기를 한 번 베는 것과 같아서 십 년을 가도 회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一次大動 十年難復. 네 살에 어머니를 잃고, 그 슬픔이 풀릴 자리를 찾지 못한 아이가 자라며 무표정과 단단함으로 그것을 덮어 왔다면, 이제마의 눈에 그 단단함은 건강이 아니라 이미 한 번 크게 베인 자국 위의 딱지였을 것이다.

이제마가 든 또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그는 자아가 여물기도 전에 아버지의 정신적 영향이나 시대의 가치관 같은 것이 미성숙한 정신과 몸을 변형시킨다고 보았다. 카프카에게 박힌 그 한 문장이 바로 그렇다. 제 마음의 모양을 스스로 정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말 한 줄이 먼저 들어와 아이의 정신을 한 방향으로 굳혀 놓았다.

카프카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한다. 생각으로 자기를 지탱하는 아이다. 사상심학의 말로 하면, 식견에 기대어 버티는 쪽이다. 그런데 빼앗긴 경험이 너무 이른 아이에게 그 기댐은 종종 빼앗긴 마음 — 奪心 — 의 다른 얼굴이 된다. 무엇이든 미리 알아 두어야 또 빼앗기지 않는다는 듯, 세계를 머리로 단단히 쥐려는 것이다. 까마귀가 끓는 마음의 자리에서 솟아 그를 떠미는 장면은, 이제마가 마음이 끓어 제2의 무언가에 휘둘리는 상태로 본 것과 멀지 않다. 어느 체질이라 못 박을 일은 아니다. 다만 이 아이의 단단함이 타고난 강함이 아니라 빼앗기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라는 것 — 그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게 다 그 아이 안에서 일어난 일일까

여기까지의 세 렌즈는 한 점으로 모인다. 저주는 결국 그의 것이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융의 그림자, 이제마의 끓어 넘친 마음 — 셋 다 카프카가 안에서 해야 할 일을 가리킨다. 그림자를 마주하라, 빼앗긴 마음을 가라앉혀라, 제 안의 소망을 보라.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네 살에 버려지고 미리 저주받은 아이를 그 평면 안에서만 보고 나면, 한 가지가 자꾸 걸린다. 그 저주는 카프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어머니가 그를 두고 사라졌을 때 그는 네 살이었다. 아버지가 그 문장을 박았을 때 그는 아무 말도 고를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러니 “네 안의 일이니 네가 풀라"는 말은, 어딘가 청구서를 잘못 내민 것 같다. 응고된 자리를 만든 건 場인데, 그것을 녹이는 숙제는 아이 혼자 떠안는 모양새다.

이제마는 같은 자리를 다르게 본다. 그는 識見을 지닌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래서 속이는 役이 그에게 떨어진다고 적었다 — 我有識見 人必歸我 我必行欺. 매 구절에 必이 두 번씩 박혀 있다. 그건 도덕 판단이 아니라 구조의 필연을 가리키는 말이다. 나쁜 사람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자리가 나쁜 役을 배정한다는 것. 카프카에게 떨어진 그 역할 —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하리라는 — 도 아이의 본성에서 자란 게 아니라 그가 놓인 자리에서 그에게 배당된 것이다.

이제마가 든 물 비유가 여기서 산다. 같은 물이 산속에 있으면 샘물, 강가에 있으면 강물, 바다에 닿으면 바닷물이라 불린다. 이름은 물의 본성이 아니라 그 물이 지금 놓인 자리의 지칭이다. 카프카에게 붙은 저주받은 아이라는 이름도 그렇다. 그건 그의 씨앗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자리와 사라진 어머니라는 자리가 그를 잠시 굳혀 놓은 그 자리의 이름일 뿐이다. 악이 실체가 아니라 굳음이라는 건, 굳음을 만든 손을 빼고 아이만 탓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달아날수록 따라오는 아이 — 『해변의 카프카』 다무라 카프카

돌아가는 일

그렇다면 구할 길은 어디 있는가. 이제마는 자리 자체를 바꾸는 문제는 답하지 않는다. 그건 그의 책 바깥의 일이다. 아버지를 없던 사람으로 만들 수도, 네 살의 작별을 되돌릴 수도 없다. 場은 못 바꾼다.

그가 남긴 건 다른 것이다. 속이는 마음이 일어나 실제로 속임으로 흐르기 직전 — 그 찰나에 다른 자리로 떠오르는 것. 길에서 돌아서는 게 아니라 길에서 잠깐 솟아오르는 것. 그는 이것을 매번 다시 잃고 다시 돌아오는 일이라 했다. 이긴 판도, 도달한 끝도 없다. 그저 매 순간 그 기울기를 한 번 더 바꾸는 일이다.

카프카가 숲에서 돌아 나오는 장면이 그래서 오래 남는다. 그는 무엇을 이기지 않았다. 저주는 풀리지 않았고, 사라진 어머니가 돌아온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돌아가기로 한다. 까마귀가 잠들라고 말하고, 그는 잠든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돌아간다는 그 행위 하나가 이상하게 단단하다. 도달점이 없어서 오히려 매번 새로 시작하는, 그런 종류의 단단함.

밤 정류장의 그 아이는 결국 버스를 탔다. 배낭은 여전히 무거웠고, 표정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이었다. 나는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다만 짐을 줄여서가 아니라 짐을 진 채로 한 발을 떼는 일도 있다는 걸, 그날 어렴풋이 봤다. 카프카가 한 일도 아마 그런 것이었을 테다. 등에 진 것을 마침내 내려놓는 게 아니라, 그것을 진 채로 돌아서는 일.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