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한 손만 놓지 않은 남자 — 『1Q84』 텐고

한 손만 놓지 않은 남자 — 『1Q84』 텐고

· 최장혁· 텐고

어떤 기억은 길이를 무시한다. 실제로는 십 초쯤이었을 일이 어떻게 사십 년을 차지하는지, 나는 가끔 그게 이상하다. 길게 머문 시간은 대개 흐릿하게 뭉개지고, 정작 선명하게 남는 건 짧고 사소한 장면들이다. 누가 문을 닫고 나간 뒤의 빈 복도, 식어버린 찻잔, 말없이 잡았다 놓은 손 같은 것. 그런 장면은 두께가 없는데도 무겁다. 두께가 없어서 더 무거운 건지도 모른다.

가와나 텐고는 그런 장면 하나를 평생 짊어지고 다니는 남자다. 정확히는 두 개. 하나는 그가 한 살 반일 때 본 것이라고 그가 믿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열 살 때 텅 빈 교실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는 큰 몸을 가졌고, 수학을 가르치고, 소설을 쓰고 싶어 한다. 겉보기엔 조용하고 안정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 두 장면이 불쑥불쑥 그를 덮칠 때마다, 그는 길 한복판에서도 동작을 멈춘다. 숨이 가빠지고, 잠깐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놓친다. 나는 진료실 밖에서도 그런 종류의 멈춤을 더러 본다. 멀쩡히 말하다가 어떤 단어 앞에서 갑자기 표정이 비는 사람들. 그 빈자리가 어디서 오는지 궁금해질 때, 나는 몇 권의 책을 차례로 펼쳐보는 버릇이 있다.

프로이트라면 텐고의 첫 번째 장면부터 손을 댔을 것이다. 한 살 반의 아이가 본, 어머니가 아버지 아닌 남자에게 가슴을 맡기고 있는 그 짧은 영상. 프로이트가 흥미로워했을 지점은 그게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렇게 어린 아이는 그 장면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도 그게 사라지지 않고 몸 어딘가에 박혀 있다가 한참 뒤에야 효력을 낸다는 것이다. 그는 이걸 사후작용이라 불렀다. 유년의 외상은 마치 갓 일어난 일처럼 뒤늦게 작동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한 살 반에 받은 인상을 아이는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해하고 흔들리는 건 훨씬 나중이며, 의식으로 붙잡는 건 또 한참 뒤라고 그는 어느 사례에서 적었다. 텐고가 그 영상을 “본” 시점과, 그게 그를 마비시키는 시점 사이에는 그렇게 수십 년의 시차가 있다.

그리고 그 영상이 유난히 선명하다는 점. 텐고는 그 장면을 비현실적일 만큼 또렷하게 떠올린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도한 선명함을 의심했다. 억압된 기억이 있을 때, 정작 의식에 떠오르는 건 그 기억 자체가 아니라 거기 인접한, 사소하지만 이상하게 또렷한 이미지일 때가 많다고. 그는 환자들이 ‘지나치게 선명한’ 장면을 떠올린다고 적었다. 떠오른 것이 사건의 핵심이 아니라 그 곁의 세부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가려진 진짜는 따로 있고, 그 앞에 선명한 가림막 하나가 세워진 셈이다. 텐고가 평생 들여다본 그 한 컷도, 어쩌면 그가 차마 보지 못한 무언가의 가림막일 수 있다.

문제는 그 한 컷이 그를 어떻게 만들었느냐다. 텐고는 흐름에 떠밀리는 사람이다. 편집자가 대필을 제안하면 망설이다 따라가고, 연상의 여자친구가 정한 요일에 정한 방식으로 만나고, 자기 인생의 큰 결정들을 대체로 남이 굴리는 대로 둔다. 프로이트라면 이걸 게으름이 아니라 비용으로 읽었을 것이다. 박힌 외상을 눌러두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쓰여서, 정작 살아야 할 일에는 쓸 게 남지 않는 상태. 그는 외상이 들어온 뒤에도 계속 작동하는 이물질 같다고 했고, 그래서 사람은 자기 외상에 붙들린다고 했다. 그렇게 붙들린 사람은 현실에서 슬그머니 물러난다. 가벼운 신경증조차 현실과의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심하면 그것은 실제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된다고 그는 적었다. 텐고가 1Q84라는, 달이 두 개 뜬 세계로 그토록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도 그래서 묘하게 자연스럽다. 현실에 단단히 붙어 있지 않은 사람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문턱이 낮다.

융이라면 같은 어머니를 다른 각도에서 봤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그 어머니를 외상의 출처로 봤다면, 융은 그 어머니의 빈자리를 봤다. 텐고에게 어머니는 죽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은 없는 채로 너무 크게 있다. 융은 한 남자의 영혼상을 처음 짊어지는 건 언제나 어머니이고, 나중에 그것을 이어받는 건 그의 감정을 흔드는 여자들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일찍 사라지면 그 자리는 메워지지 않은 채 안쪽에 남아, 남자의 리비도를 자꾸 뒤로 끌어당긴다. 융의 한 구절이 텐고를 거의 정확히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에게 묶여 있으면, 그가 살았어야 할 삶이 의식·무의식의 환상이 되어 달아나 버린다는 것. 텐고가 현실을 살지 않고 소설을, 그리고 결국 또 하나의 세계를 사는 것. 그건 게으름이 아니라 달아나 버린 삶의 다른 형태다.

그 빈 어머니 자리에 텐고는 두 여자를 세운다. 비현실적으로 또렷한 소녀 후카에리, 그리고 열 살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오마메. 융이라면 이걸 아니마의 투사라고 불렀을 것이다. 남자는 자기 안의 여성적 무의식을 실재하는 여자에게 비추고, 그 여자가 자기 안의 가닿지 못한 깊이를 비춰주기에 거기 묶인다고. 텐고가 한 번 손을 잡았을 뿐인 소녀를 이십 년간 잊지 못하는 건, 어쩌면 그 손이 아오마메라는 한 사람이라기보다 텐고 자신의 잃어버린 절반이어서다. 그리고 융은 한 가지 일을 더 시켰을 것이다. 후카에리의 이야기를 대필하며 텐고가 점점 어두운 다른 세계로 내려가는 것 — 그것을 융은 그림자와의 대면이라 읽었을 것이다. 그림자는 절대 악이 아니라 다만 덜 적응되고 미숙하고 어설픈 면이며, 내가 온전해지려면 나도 어두운 쪽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적었다. 텐고는 남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척하면서 사실 제 안쪽으로 내려간 셈이다.

융의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다. 그 모든 게 향하는 곳은 개성화, 흩어진 조각들이 한 사람으로 모이는 일이다. 텐고는 소설 내내 떠밀리지만, 마지막에 단 하나만은 스스로 선택한다. 손의 기억을 따라 아오마메를 찾아 나서고, 그 세계를 함께 빠져나오는 것. 융이라면 이걸 아니마 투사의 회수라고, 어머니에 묶여 환상으로 달아났던 삶이 비로소 제 몸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평소 쓰는 또 한 권을 꺼낸다. 이제마다. 그의 사람 갈래에 텐고를 얹으면, 그는 머리가 가장 앞선 쪽이다. 사물을 정연하게 꿰뚫어 짜는 힘이 맨 앞에 서고, 수학과 이야기의 구조를 한 손에 쥐는 재주가 거기서 나온다. 이제마는 그런 사람일수록 그 머리의 정반대 자리 — 감정 — 이 가장 늦되고 서툴다고 봤다. 텐고가 딱 그렇다. 알아보고 헤아리는 데까지는 누구보다 깊이 가는데, 그걸 말로,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가닿는 정으로 옮기는 일에서는 늘 한 박자 늦거나 아예 막힌다. 그의 마비는 머리가 멈춰서가 아니다. 머리만 남고 정이 따라 나오지 않아서다. 그가 학원에서 가르치고 글을 쓰고 정해진 요일의 관계를 이어가면서도 끝내 아무에게도 닿지 못하는 건 그래서다. 그는 안으로 숨은 사람이 아니라, 가장 여린 한 곳만 끝끝내 안 열리는 사람이다.

이제마라면 한 가지를 더 짚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못 쓰는 자리를 메우려 멀리 있는 능력 하나를 끌어다 쓴다. 텐고의 경우 그건 멀리, 깊이 내다보는 눈이다. 눈앞의 정을 못 다루는 대신, 한참 앞과 바닥을 꿰뚫어 보는 통찰로 자신을 버틴다. 이제마는 그렇게 빌려 쓰는 자리엔 그늘이 따라붙는다고 적었다. 제 것이 아닌 것을 제 것인 양 그러쥐려는 마음. 한 번 잡힌 손을 사십 년간 제 것으로 쥐고 놓지 않는 텐고의 마음이 거기 있다. 그리고 그가 이런 사람의 평생 과제로 본 건 흔들림이었다. 늘 제자리를 의심하며 안정되지 못하는 마음. 텐고가 길 한복판에서 자기가 어디 서 있는지를 놓치는 그 멈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 이제마도 융처럼 텐고를 같은 쪽으로 떠밀었을 것이다. 그 막힌 정을 끝내 제 몸으로 살려내는 데 그의 회복이 있다고.

그런데 네 번째 책을 펴면 이야기가 갈라진다. 불교다. 텐고가 한 손을 사십 년간 놓지 않는 그 마음을, 아함의 경전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갈애. 한 경전은 그것을 그물이라 하고 아교라 하고 샘물이라 하고 연뿌리라 한다. 그것이 중생을 덮고 묶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끌고 다니며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고. 텐고의 손이 그렇다. 그 기억은 그를 붙잡아 한자리에 두지 않고, 끝없이 그리워하게 만들고, 만나지 못한 사람을 향해 평생을 끌고 간다. 다른 경전은 더 나아가, 욕심과 견해와 나에 대한 집착을 끊으라고 한다. 불교의 처방은 분명하다. 그 손을 놓아라.

여기서 두 갈래가 정면으로 부딪힌다. 한쪽에서 프로이트와 불교가, 그 손은 너를 묶는 것이라고, 외상이고 갈애이니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쪽에서 융과 이제마가, 그 손은 네 잃어버린 절반이고 네가 행함으로 건너갈 다리이니 끝까지 쥐고 따라가라고 말한다. 같은 한 컷을 두고 한쪽은 놓으라 하고 한쪽은 붙잡으라 한다. 텐고 자신은 어느 쪽을 택했는가. 그는 놓지 않았다. 모든 걸 떠밀리는 대로 두던 남자가, 단 하나 그 손만은 끝까지 쥐고, 그것을 따라 다른 세계까지 건너갔다가 함께 돌아왔다.

그러니 이 네 권은 한 점으로 모이지 않는다. 모이는 척하다가 마지막에 갈라진다. 다만 갈라지기 전에, 한 가지에서는 네 권이 이상하리만치 같은 말을 한다. 텐고가 수동적이라는 것. 프로이트는 그걸 외상에 에너지를 빼앗긴 마비라 했고, 융은 어머니에 묶여 삶이 환상으로 달아난 상태라 했고, 이제마는 가장 여린 감정 한 곳이 끝내 안 열린 자리라 했고, 불교는 갈애의 그물에 끌려다니는 모습이라 했다. 진단은 한자리에 모인다.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만 길이 갈린다.

한 손만 놓지 않은 남자

어쩌면 그래서 텐고가 오래 남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떠밀려 사는 내내 단 하나만은 놓지 않았고, 그 하나가 그를 묶은 동시에 그를 건넜다. 묶임과 건넘이 같은 손이었다는 것. 네 권 중 어느 책도 그걸 혼자서는 다 설명하지 못한다. 놓으라는 책은 그가 그걸 쥐고 살아 돌아온 사실을 설명하지 못하고, 붙잡으라는 책은 그 손이 그를 사십 년간 멈춰 세운 무게를 가볍게 본다.

나는 진료실 문을 닫고 나서면 가끔 그 빈 교실을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 말없이 손을 잡았다 놓는 십 초. 그게 평생을 차지한다면, 그건 병일까 구원일까. 나는 아직 한쪽으로 답하지 못한다. 다만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을 마주할 때, 그것을 너무 빨리 놓게 하지도, 너무 단단히 쥐게 하지도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어떤 손은 묶으면서 건넨다. 텐고는 그걸 끝까지 쥐고 있던 남자다.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