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한 번의 손을 평생 쥔 여자 — 『1Q84』 아오마메

한 번의 손을 평생 쥔 여자 — 『1Q84』 아오마메

· 최장혁· 아오마메

손을 잡는 일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맞잡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몇 초다. 악수는 두세 번 흔들고 놓고, 아이의 손은 길을 건너는 동안만 쥔다. 대부분의 손잡음은 그렇게 짧고, 짧아서 잊힌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단 한 번의 손잡음이 한 사람의 평생을 통째로 결정하는 일이 있다. 몇 초가 수십 년을 지배한다. 그게 가능한가 싶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으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를 한 여자가 보여준다.

아오마메. 여성을 학대한 남자들을 소리 없이 처단하는 청부 살인자. 그녀의 모든 것은 열 살의 어느 방과 후, 텅 빈 교실에서 시작된다. 가난한 같은 반 소년 덴고가, 아무도 없는 그 교실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그뿐이다. 말도 거의 없었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이십 년을 떨어져 산다. 그런데 아오마메는 그 몇 초를 평생 쥔 채 놓지 않는다. 다른 누구의 손도 그 자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프로이트라면 이 장면을 사후작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열 살의 그 순간,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그 장면의 진짜 무게는 한참 뒤에야 깨어난다. 표준판 어딘가에서 그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그때는 거의 아무 효과도 내지 못하다가 무의식에 남아 있던 흔적으로서 뒷날 깨어나 마치 동시대의 사건처럼 작동한다고 적었다. 늑대인간을 그렇게 읽었다. 다만 그가 다룬 건 끔찍한 원장면이었고, 아오마메의 것은 정반대다. 그녀에게 그 손은 외상이 아니라 구원의 원장면이다. 평생을 거슬러 점화되어, 그녀라는 사람을 통째로 그 한 점을 중심으로 재조직한다.

문제는 그 손을 쥔 방식이다. 잃어버린 대상을 너무 강하게 붙들면, 마음은 그 대상을 새로운 누군가로 옮기지 못하고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 자신과 동일시한다. 프로이트는 멜랑콜리를 설명하며, 잃은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운다고 했다. 아오마메가 꼭 그렇다. 그런데 여기엔 묘한 비틀림이 있다. 그녀는 덴고를 잃은 적이 없다. 애초에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한 번도 연인이었던 적 없는 사람을 이십 년간 애도하는 셈이다. 그래서 그 애도는 끝날 수가 없다. 끝나려면 잃었어야 하는데, 잃을 것이 없었으므로. 그녀의 정체성 자체가 덴고의 부재를 핵으로 굳어버린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살인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아이가 실패를 던졌다 당겼다 하는 놀이를 보며, 사람은 자신을 압도한 무력한 경험을 기억이 아니라 행동으로 되풀이하면서, 당한 자리에서 하는 자리로 옮겨 그것을 지배하려 한다고 했다. 아오마메는 친구 다마키의 죽음 앞에서, 또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무력을, 그녀는 남자들을 처단하는 능동의 자리로 뒤집는다. 본래 자기 안으로 향했어야 할 파괴의 힘을 밖으로 돌려놓았기에, 그녀는 무너지는 대신 손에 도구를 든다. 소설의 끝에서 권총을 입에 무는 그 한순간만, 그 힘이 잠깐 안쪽으로 꺾인다. 그리고 덴고를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그 손가락을 멈춘다.

융을 펴면 다른 그림이 겹쳐 온다. 덴고는 아오마메가 평생 안에 품고 다닌 남자의 상, 아니무스다. 융은 여자의 아니무스가 보통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권위자의 목소리가 모인 의회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봤다. 그런데 아오마메의 것은 이상하리만치 단일하다. 열 살 소년의 손 하나로 결정처럼 굳어 있다. 가장 먼저 그 자리에 있던 건 증인회의 엄한 신앙, 아버지의 경직된 진리였고, 그녀는 그 딱딱한 진리에서 풀려나면서 그 모든 무게를 덴고 한 점으로 옮겨 얼려버렸다.

그녀가 1984년에서 1Q84의 세계로 내려가는 길도 융의 언어로 읽힌다. 고속도로 비상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그 하강은, 표면의 의식에서 더 깊고 오래된 층으로 가라앉는 밤바다 항해다. 끔찍한 퇴행처럼 보이지만, 융에게 그런 침잠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필연의 통과다. 하늘에 달이 두 개 뜬다.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이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객관화된 것이다. 융은 달이 본래 밝은 얼굴과 어둠의 얼굴을 함께 가진다고 했다. 작고 일그러진 초록빛 두 번째 달은, 분리되어 나온 무의식이 실재가 된 모습이다. 그리고 살인이라는 그녀의 능력은 그림자다. 자기 안의 죽일 수 있는 힘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정밀하게 떠안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역설적으로 자기 어둠과 마주 선 사람이다.

여기서 내 전공의 렌즈를 하나 더 얹어본다. 이제마의 사상심학이다. 아오마메를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기쁨과 즐거움이 거의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십 년의 금욕, 웃음 없는 삶, 처단할 대상과 기다릴 한 사람만 남은 내면. 그 빈자리를 분노와 슬픔이 가득 채운다. 이제마는 슬픔과 노여움의 기운은 위로 솟구치고 기쁨과 즐거움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앉는다고 보았다. 아오마메는 평생 위로만 솟구쳐 굳어 있는 사람이다. 아래로 내려와 풀어질 줄을 모른다.

이런 사람을 이제마는 슬픔과 노여움으로 기운 쪽, 그중에서도 태양인의 결로 읽었을 것이다. 태양인을 두고 그는 슬픔은 멀리 흩어지고 노여움은 촉급하다고 적었다. 여성 일반의 수난을 향한 멀고 추상적인 비애와, 친구의 죽음 앞에 급박하게 무너지는 슬픔. 그 두 결이 그녀 안에 함께 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다. 사상심학은 사람의 마음을 직관·감정·사고·감각 네 기능의 위계로도 읽는데, 태양인은 직관이 으뜸이고 그다음이 감정, 사고는 세 번째다. 건강한 태양인이라면 날카로운 직관 위에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감정을 세운다. 위협을 받을 때 관계로 자기를 지키는, 그 따뜻한 두 번째 기능 말이다.

그런데 아오마메에게는 바로 그 두 번째 기능이 죽어 있다.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사고다. 살인을 감정 없이 논리와 정의로 처리하는 그 정밀함은, 두 번째 자리에 와야 할 따뜻한 손을 건너뛰고 세 번째 자리의 냉정한 머리로 곧장 가버린 사람의 것이다. 손을 잡는 기능이 죽고, 칼을 쥐는 기능만 남았다. 그리고 그 죽은 손은 평생 단 한 곳, 덴고에게만 열린다. 살아 있는 누구와도 깊이 닿지 못하는 사람이, 현실에 없는 한 사람의 손만은 평생 쥐고 있다.

세 권의 책을 나란히 덮고 나면, 셋이 결국 한 곳을 가리키고 있는 게 보인다. 프로이트의 멜랑콜리도, 융의 굳은 아니무스도, 이제마의 죽은 두 번째 기능도, 결국 같은 말을 한다. 아오마메는 손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 손을 다시 펴 한 사람을 잡는 순간 그녀는 구원받는다고. 소설의 마지막,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사다리를 오르는 장면이 그래서 그렇게 뭉클하다.

한 번의 손을 평생 쥔 자리

그런데 이 세 권을 덮고 나면, 한 가지가 자꾸 걸린다. 이게 다 그 사람 안에서만 일어난 일일까.

손을 펴지 못한다는 말에는, 펼 수 있는데 안 폈다는 뜻이 슬그머니 들어 있다. 그래서 셋 다 그녀를 들여다볼수록, 그녀가 그 손을 끝내 닫아둔 사람처럼 읽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오마메의 손은 그녀가 닫은 게 아니다. 묶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어릴 때, 스스로 무엇 하나 고를 수 없던 시절에. 증인회라는 신앙의 집이 그 작은 손에 전단지를 쥐여 집집마다 끌고 다녔고, 학교에서 그 손은 기도 때문에 따돌림의 표지가 되었다. 자기 자리를 자기가 정하기 한참 전에, 놓인 자리가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먼저 정해버렸다. 이제마가 적은 그대로다. 사람의 능력은 그가 선 자리가 명한다.

살인자라는 자리도 그렇다. 그녀가 어느 날 악(惡)을 택해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다마키가 맞아 죽고, 또 한 여자가 짓밟혀 죽는 세계가, 그 손에 칼을 쥐여준 것이다. 이제마는 사람의 악함이라는 게 타고난 씨앗이 아니라고 보았다. 같은 물이 자리에 따라 샘물도 되고 흙탕물도 되듯, 비루함도 탐욕도 모질음도 그 사람의 본바탕이 아니라 지금 그가 굳어 있는 자리의 이름일 뿐이라고. 한 사상심학 강의록에는, 이런 굳음은 바깥 환경에 적응하거나 자기 의지가 스스로를 비트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지 그 자체가 병은 아니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니 아오마메를 두고 그녀가 마음을 닫아서, 사람을 못 믿어서라고 말하는 건, 묶인 손을 보고 왜 펴지 않느냐 묻는 것과 같다.

이제마는 굳은 사람의 눈에 대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한번 굳어버린 자리는 그 사람의 보는 눈 자체를 비틀어, 세상이 실제보다 더 위험하게만 보인다고. 아오마메에게 살아 있는 관계란 늘 배신과 폭력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다마키가, 또 한 사람이 그걸 증명했다. 그러니 그녀가 살아 있는 손을 피해 부재하는 덴고에게로 도망친 것은 비겁이 아니라, 굳은 눈에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덴고는 없어서 안전하고, 가질 수 없어서 잃을 일도 없다. 그 동결은 그녀가 택한 게 아니라, 그녀가 놓인 자리가 그녀에게 가르친 유일한 안전이었다.

그렇게 보면 『1Q84』라는 그 방대한 이야기가 끝내 그녀에게 해준 일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소설은 그녀의 죽은 손을 고쳐주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녀는 덴고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도 다시 손을 잡기 시작했어야 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반대로 흐른다. 그녀의 곁에 있던 사람들은 죽거나 흩어지고, 모든 마음은 덴고 한 점으로 점점 더 좁게 모인다. 회복이 아니다. 이제마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 손이 다시 착해진 게 아니라고. 평생 솟구쳐 굳어 있던 기운이, 단 한순간 다른 결로 떠오른 것뿐이라고. 그가 말한 떠오름에는 도착지가 없다. 매번 떠오르고 매번 도로 가라앉는, 멈추지 않는 움직임 그 자체가 거기서는 완성이다.

소설이 준 것은 그러니까 치유가 아니라, 그 묶인 손을 딱 한 번 펴볼 안전한 자리다. 평생 누구에게도 내밀지 못한 손을, 잃을 걱정 없는 한 사람에게 내밀어보는 단 한 번의 기회. 그것도 그녀가 자기 힘으로 묶인 자리를 풀어서가 아니라, 운명이 두 개의 달이 뜬 세계를 통째로 비틀어 두 사람을 같은 사다리 위에 세워주었기 때문이다. 자리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다만 굳은 손이 잠깐, 펴졌다. 그래서 그 결말은 연애의 끝이지 결혼의 시작은 아니다. 손을 잡은 그 자리까지가 이야기이고, 그 손을 잡은 채 서로의 누추한 아침을 견디는 일은 페이지 바깥에 남는다.

다시 손을 생각한다. 우리는 대개 손을 잡는 데 몇 초를 쓰고 잊는다. 그 짧음이 사실은 다행인지도 모른다. 한 번의 손이 평생을 묶어버리지 않을 만큼, 우리 대부분은 자리에 덜 짓눌렸다는 뜻이니까. 아오마메는 그러지 못했다. 너무 일찍, 너무 외로운 자리에서 그 손을 받았고, 그래서 평생을 그 몇 초에 걸었다. 그녀를 두고 마음을 열라고, 사람을 믿으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묶인 손에게 그런 말은 들리지 않는다. 그 손이 마지막에 한 번 펴졌다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받을 수 있던 전부였다는 것. 거기서 멈춰 선 채로, 나는 그녀의 손을 오래 들여다본다.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