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이쪽에 살지 못한 여자 — 『노르웨이의 숲』 나오코

이쪽에 살지 못한 여자 — 『노르웨이의 숲』 나오코

· 최장혁· 나오코

수영장에서 보면 안다. 어떤 사람은 힘을 빼도 물 위에 가만히 뜨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팔다리를 저어도 자꾸 아래로 끌린다. 부력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몸의 비중, 타고난 밀도의 문제다.

나는 오래 이걸 수영 실력 차이로만 봤다. 그런데 어떤 몸은 처음부터 물보다 조금 무겁게 태어난다. 같은 물에 들어가도 한쪽은 뜨고 한쪽은 가라앉는다. 물이 다른 게 아니라 몸이 다른 거다. 나오코를 떠올리면 자꾸 그 비중이 생각난다. 그녀는 슬픈 일을 겪어서 가라앉은 게 아니라, 애초에 이쪽 세계에 뜨기엔 너무 무거운 비중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보인다. 같은 물에서 와타나베는 떴고, 그녀는 가라앉았다.

이 글은 그 비중을 들여다보는 글이다. 그녀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왜 처음부터 이쪽에 살기 어려웠는가.

잃어서가 아니라, 닻을 내린 적이 없어서

프로이트라면 처음엔 멜랑콜리아를 떠올렸을 것이다. 사랑하던 대상을 잃고, 그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에 내려앉아, 잃은 것을 자기 안에 끌어안은 채 자아가 빈곤해지는 상태. 그는 그것을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웠다"는 한 문장으로 적었다. 키즈키를 잃은 나오코에게 잘 맞는 그림처럼 보인다. 잃은 사람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기 안에 품은 채 시들어가는 여자.

그런데 프로이트 자신이 그어둔 감별선이 자꾸 걸린다. 그는 멜랑콜리아 환자의 특징을 한 가지 묘하게 적어두었다. 자기를 끊임없이 헐뜯으며 떠드는, 자기 노출에서 어떤 만족을 찾는 집요한 수다스러움. 멜랑콜리아의 우울은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시끄럽다. 환자는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지를 남들 앞에서 쉬지 않고 고발한다.

나오코는 정반대다. 그녀는 떠들지 못한다. 말이 자꾸 막히고, 느낌과 그것을 담을 말 사이가 끊긴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 말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기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놓친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런 것들 — 말의 해체, 비현실감, 정서의 공허 — 을 멜랑콜리아가 아니라 더 깊은 곳에 두었다. 리비도가 대상에서 완전히 철수해, 바깥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도 더는 닻을 내리지 않고, 원시적인 무대상 상태로 물러난 자리. 거기서는 사랑할 외부가 사라질 뿐 아니라 말조차 사물처럼 다뤄져 문장이 부서진다. 그는 그것을 멜랑콜리아의 시끄러운 자기고발과 분명히 갈라놓았다.

그러니까 그녀의 무너짐은 무언가를 잃은 데 대한 반응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잃기 전부터, 그녀의 리비도는 바깥 세계에 단단히 매인 적이 없었다. 언니가 같은 나이에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는 사실이 그 비중을 가리킨다. 슬픔이 그녀를 가라앉힌 게 아니라, 가라앉는 비중이 먼저 있었고, 두 죽음은 그 비중을 수면 위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멜랑콜리아는 잃어서 아픈 병이다. 나오코의 것은 처음부터 이쪽에 자기를 두지 못한, 더 이른 자리의 일처럼 보인다.

연약한 섬, 그리고 그 섬을 덮친 적 없는 폭풍

융은 의식을 “기만적인 무의식의 바다에 둘러싸인 연약한 섬"이라고 불렀다. 평소에는 섬이 바다를 견딘다. 우리는 매일 그 위에서 멀쩡히 걸어 다닌다. 그런데 어떤 섬은 처음부터 해수면보다 겨우 한 뼘 높다. 잔잔한 날에도 발목이 젖는다.

융은 가까운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자가 죽은 자의 자리로 “끌려 들어가는” 일을 적었다. 무의식이란 본래 꿈의 나라이면서 동시에 죽은 자와 조상들의 나라다. 거기 너무 깊이 얽히면 섬은 잠긴다. 그는 테세우스를 예로 들었다. 친구를 구하러 저승에 내려갔다가 바위에 몸이 붙어 영영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내. 깊은 곳을 탐사하러 내려갔다가 그 깊은 곳에 묶여버리는 비극.

나오코를 여기 겹쳐 읽고 싶은 유혹이 크다. 언니가, 그리고 키즈키가 그녀를 저승의 바위에 묶었다고. 하지만 융이 이 그림을 그리면서 함께 적어둔 단서가 하나 더 있다. 이런 끌림은 흔히 잠복해 있던 정신병이 급성으로 발현하는 위험한 국면과 겹친다는 것. 즉 바다가 섬을 삼키는 게 아니라, 본래 너무 낮았던 섬이 평범한 만조에도 잠긴다는 쪽에 가깝다.

이 차이는 작다. 그러나 결정적이다. 죽은 자가 그녀를 끌고 갔다고 하면, 그녀는 정상적인 섬이었는데 유난히 거센 두 번의 파도를 만난 불운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같은 키즈키의 죽음 앞에서 와타나베는 살아남았고, 같은 요양원의 레이코도 제 방식으로 버텼다. 같은 바다, 같은 만조였다. 한 섬만 잠겼다면, 그 차이는 파도가 아니라 섬의 높이에 있다. 융의 표현을 빌리면, 그녀의 섬은 처음부터 해수면에 너무 가까웠다. 아미 기숙사의 그 고요한 시간은 통합을 되찾은 게 아니라, 바다가 잠깐 잔잔해진 것뿐이다. 자극을 다 걷어낸 자리에서 섬은 잠시 마른 듯 보였지만, 높아지지는 않았다.

한 번 크게 흔들리면, 십 년이 돌아오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한의사로서 이제마를 펼친다. 다만 조심스럽게다. 나오코의 체질을 못 박고 싶지는 않다. 작중의 그녀는 안으로 가라앉고 말이 적고 몸이 약하니 얼핏 소음인의 결로 읽히지만, 마음이 사물처럼 굳어가는 그 멈춤은 이제마가 태음인의 겁심(怯心)을 두고 한 말에 더 가깝다. 한 인물이 두 체질의 언어에 동시에 걸린다. 그러니 체질로 그녀를 분류하려는 시도는 접고, 이제마가 말한 한 가지 결만 빌리기로 한다.

『의원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즐겨함이 극에 달해 이루어지지 못하면 좋아하는 마음이 정처를 잃는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크게 동하는 것은 칼로 장기를 한 번 베는 것과 다름없어, 한 차례 크게 흔들리면 십 년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이제마는 이것을 사람의 생사와 수명이 갈리는 길목이라 적었다.

나오코를 이 문장 위에 올려본다. 키즈키와의 일은 그녀에게 한 번의 자극이 아니라 한 번의 절단이었다. 그리고 이제마의 말대로라면, 그런 절단은 의지로 다시 봉합되지 않는다. 십 년이 걸려도 돌아오지 않는 자리가 있다. 흥미로운 건 이제마가 이걸 외부 사건의 크기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같은 일을 겪어도 어떤 국(局)은 베이고 어떤 국은 견딘다. 베임의 깊이는 칼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형세가 결정한다. 다시 비중의 이야기다. 같은 무게의 돌을 얹어도, 본래 얕게 잠긴 배가 먼저 가라앉는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어야겠다. 그렇다고 그녀를 둘러싼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세 살부터 키즈키와 한 울타리에서 자라 바깥세상을 따로 마주할 필요가 없었던 시간은, 그 얕은 비중을 더 얕게 굳혔을 것이다. 두 죽음이 비중을 만든 원인은 아니어도, 이미 기운 비중이 더 빨리 가라앉게 한 가속이었다. 환경을 0으로 지우면 그것도 거짓이다. 다만 무게중심은 사건이 아니라 그녀 안에 있었다.

이쪽에 살지 못한 여자

끊으라는 말이, 끊을 사람이 없는 자리에 닿을 때

마지막으로 불교를 펼친다. 중아함의 라운경은 사랑하는 것과 이별하는 괴로움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던 것들이 흩어지고 달라져 다시 서로 모이지 못하게 될 때 괴로움이 생긴다고. 그리고 그 괴로움의 뿌리를 애(愛), 곧 집착과 물듦에 둔다. 애가 있으면 괴로움이 일어나고, 그 애를 끊어 다 뱉어내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자리에서 그 사랑을 놓지 못하는 마음이 괴로움을 붙든다는 것.

나오코에게 이 그림은 절반만 맞는다. 苦의 구조는 정확하다. 그녀는 흩어진 것들을 다시 모으려는 마음을, 죽은 자들을 향한 애를 놓지 못한다. 거기까지는 라운경 그대로다.

문제는 처방 쪽이다. 불교는 애를 끊으라고 한다. 그런데 끊는다는 것은 끊을 주체를 전제한다. 손이 있어야 쥔 것을 놓는다. 나오코에게는 그 손이, 그 주체가 처음부터 온전히 서 있지 않았다. 세 살부터 키즈키와 한 회로로 자란 그녀는 키즈키와 분리된 ‘나’를 따로 세운 적이 없다. 끊어야 할 애와 끊어야 할 나가 분화되지 않은 채 한 덩어리로 있었다. 그러니 “그를 놓아라"라는 말은 “너의 절반을 잘라내라"가 된다. 절반을 잘라낸 나머지 절반이 따로 서 있다면 모를까, 그녀에게는 그 나머지가 없었다.

불교의 길은 옳다. 다만 그 길은 길을 걸을 두 발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나오코의 비극은 애가 너무 강해서가 아니라, 그 애를 끊고 남을 자기가 처음부터 거기 없었다는 데 있다. 苦滅의 처방이 그녀 앞에서 헛도는 건 처방이 틀려서가 아니라, 처방을 받을 주체가 미처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 길이 한 자리에서 만난다

프로이트는 그녀의 리비도가 바깥에 닻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한다. 융은 그녀의 섬이 처음부터 해수면에 너무 가까웠다고 말한다. 이제마는 그녀의 국이 한 번의 절단으로 십 년이 돌아오지 않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고 말한다. 불교는 끊을 애는 있는데 끊을 주체가 없다고 말한다.

네 사람은 다른 언어로 같은 한 자리를 가리킨다. 나오코는 무언가를 잃어서 무너진 게 아니라, 애초에 산 자 쪽에 자기를 세운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죽음이 그녀를 데려간 게 아니라, 그녀는 한 번도 이쪽에 완전히 와 있던 적이 없었다. 두 번의 죽음은 그 사실을 드러낸 방아쇠였지, 그것을 만든 원인이 아니다.

이렇게 읽으면 나오코는 더 가벼워지는가, 더 무거워지는가. 둘 다인 것 같다. 가벼워진다 — 그녀의 죽음은 누군가 밀어서가 아니라, 본래 그쪽에 가까웠던 비중이 끝내 수면 아래로 내려간 것이니. 그녀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무거워진다 — 그렇다면 처음부터 손쓸 자리가 적었다는 뜻이기도 하니. 와타나베가 더 잘했다면 그녀가 떴을 거라는 위안조차, 이 독법에서는 흐려진다.

다시, 비중

수영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가라앉는 몸에게 억지로 뜨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호흡을 길게 쥐어 폐에 공기를 채우게 하고, 천천히 힘을 빼게 한다. 비중은 못 바꿔도, 잠깐 떠 있는 순간들을 늘려갈 수는 있다는 듯이.

나오코에게는 그 잠깐의 순간들이 너무 적었다. 와타나베와 닿았던 한 번의 밤이, 어쩌면 그녀가 수면 위로 가장 높이 떠올랐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번의 들숨으로 가라앉는 비중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녀는 곧 다시 내려갔다.

나는 가끔 그런 사람을 생각한다. 슬퍼서 가라앉은 게 아니라, 그저 이쪽 물에 뜨기엔 너무 무거운 비중으로 태어난 사람. 그들에게 “조금만 더 힘내라"는 말이 얼마나 가닿지 않는지를. 비중은 게으름이 아니다. 나오코는 노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쪽에 살기 어려운 몸이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그녀를 가장 덜 모욕하는 읽기인 것 같다.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