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지를 가늠하는 눈이었다. 옷매무새를 고치고, 한 발 물러서 보고, 다시 다가가 살피는 그 동작이 어쩐지 오래 마음에 남았다. 거울 속에 자기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비춰 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분명 있다.

그러다 한 여자가 떠올랐다. 응석받이 부잣집 딸로 시작해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결혼식장을 뛰쳐나와, 커피를 나르다가, 끝내 패션업계의 어엿한 커리어 우먼이 된 여자. 레이철 그린. 여섯 친구 중에 가장 화려하고, 가장 많이 변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또렷하게 성장한 사람.

레이철의 서사는 분명 성장담이다. 아무것도 혼자 할 줄 모르던 공주가 자기 발로 서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그 성장담을 오래 들여다보면 묘하게 풀리지 않는 매듭이 하나 있다. 그녀가 그토록 애써 도달한 자리들이, 어쩐지 늘 누군가 봐주기를 바라는 자리라는 것. 그녀는 정말 자란 걸까, 아니면 자기를 봐줄 사람만 바꿔 온 걸까.

아버지의 눈

프로이트라면 먼저 아버지를 짚었을 것이다.

레이철의 아버지 그린 박사는 사랑을 조건으로 주는 사람이었다. “네가 뭘 할 수 있겠어"라는 시선이 그녀를 키웠다. 프로이트는 아버지의 조건부 사랑 아래 자란 아이가 어떤 상처를 안고 자라는지 적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 아이의 자존감에는 영구적인 흠집, 그가 나르시시즘적 상처라 부른 자국이 남는다. 그 자리에 “나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못 한다"는 깊은 의심이 깔린다. 레이철이 겉으로 아무리 당당해도, 그 밑에 늘 흐르던 불안의 출처가 여기다.

문제는 그 미충족된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못 받은 인정이, 성인이 된 뒤 만나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고 봤다. 연인, 직장 상사, 권위 있는 남자들이 모두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인물이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과거에 못 받은 인정을 받아내려 애쓴다. 독립과 성취로 스스로를 증명하려 해도, 그 본질은 대체된 대상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라 인정의 대상만 바뀔 뿐 구조는 똑같이 반복된다. 레이철의 커리어가 빛날수록 이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녀는 자기를 위해 일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그린 박사에게 “봐, 나도 할 수 있어"를 증명하려는가.

프로이트가 가장 날카롭게 본 건 그녀의 도망이다. 그는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결정적 순간에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들을 두고 “성공으로 파멸하는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 막상 현실이 되려는 순간, 자아가 그것을 위험으로 느끼고 불안을 도망치라는 신호로 써버린다는 것이다. 레이철은 결정적 순간마다 도망쳤다.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왔고, 사랑이 손에 잡힐 듯하면 회피했고, 마지막에는 파리라는 새 삶을 앞에 두고 흔들렸다. 그녀의 도망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무늬다.

빌려온 빛

융이라면 그 아버지를 다른 자리에 놓았을 것이다.

융은 딸에게 있어 아버지가 아니무스, 곧 그녀 안의 남성적 정신을 처음으로 실어 나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성과 정신의 첫 원천이다. 그런데 여성이 자기 안의 그 힘을 스스로 의식하고 자기 것으로 통합하지 못하면, 그 힘은 무의식에 머물다가 바깥의 남자에게 투사된다. 지식인, 권위자, 안정된 남자에게. 융은 말했다. 그런 남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자기가 탐구해야 할 내면의 과제를 그 남자가 대신 짊어지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라고.

레이철이 로스에게 십 년을 매여 있는 것이 이 구조다. 박사, 지성, 안정. 로스는 아버지 원형을 가장 닮은 남자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어쩌면 눈앞의 로스라기보다, 로스에게 투사한 자기 안의 아니무스 이미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까워지면 부서지고, 멀어지면 다시 끌리는 일이 끝없이 반복된다.

여기서 융은 까다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이철의 독립과 성취는 진짜 개성화인가, 아니면 가짜 성장인가. 융이 보는 진짜 성장의 기준은 단순하다. 바깥에 투사한 것을 거둬들여 자기 것으로 의식화했는가. 의존에서 벗어나 멋진 커리어를 가졌다 해도, 그것이 여전히 외부의 시선과 기준에 매여 있다면 그건 자아가 더 단단한 가면을 하나 더 쓴 것일 뿐이다. 인정의 무대를 아버지에서 직장으로 옮겼을 뿐, 밖에서 빛을 빌려오는 구조는 그대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어렵게 얻은 파리행을 포기하고 익숙한 로스에게 돌아오는 선택을, 융이라면 어떻게 봤을까. 융의 언어로는 이건 위태로운 자리다. 그는 인간이 삶의 큰 확장 앞에서 종종 과거의 익숙한 관계로 후퇴한다고 봤다. 아버지를 향한 어린 시절의 통로로 리비도가 역류하는 것이다. 책임과 고독이 따르는 자립이 두려워, 모든 것을 대신 정해주던 그 옛 관계의 품으로 돌아가려는 퇴행. 융의 기준을 엄격히 들이대면, 파리를 포기하고 로스에게 돌아간 레이철은 개성화를 완성한 게 아니라 그 문턱에서 돌아선 것이 된다.

다만 나는 여기서 융의 기준만으로 못을 박고 싶지 않다. 그 선택을 다르게 읽을 여지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건 잠시 뒤에 다시 보겠다.

확신을 입은 충동

한의사의 자리에서 보면 레이철은 소양인이다. 모니카와 같은 본체.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밖으로 뻗는 기운이 강하다. 추진력이 좋고, 시작이 빠르고, 감정을 즉각 바깥으로 쏜다.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터뜨리고, 원하는 게 생기면 곧장 움직인다. 같은 소양인이라도 모니카가 그 에너지를 안으로 조여 완벽주의로 만든다면, 레이철은 정반대로 밖으로 쏘아 버린다. 참지 않고, 숨기지 않고, 그대로 내보낸다.

흥미로운 건 그 위에 얹힌 기운이다. 소양인은 소양기 다음으로 태양기를 타고난다. 모니카가 약한 셋째 기능을 억지로 끌어올려 쓴다면, 레이철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둘째 기능, 태양기를 앞세운다. 태양기는 직관과 확신, 자기 서사를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레이철의 감정은 단순한 충동에서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 “내가 옳다”, “내가 이럴 자격이 있다"는 확신과 정당성의 서사가 입혀진다. 그냥 화를 내는 게 아니라, 화낼 자격이 자기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짓는다.

이 지점에서 로스와 묘하게 닮는다. 로스는 태음인이 소음기를 빌려 자기 분노를 피해자의 서사로 포장하고, 레이철은 소양인이 태양기를 빌려 자기 충동을 확신의 서사로 포장한다. 방향은 정반대인데 구조가 같다. 둘 다 본래의 감정을 다른 기운의 옷을 입혀 밖으로 내보낸다. 그래서 둘이 부딪히면 그렇게 격렬하고, 그래서 그렇게 서로를 못 끊는다. 거울처럼 닮은 두 사람이다.

남의 눈을 구하는 마음

마지막으로 불교의 자리에서 보면, 레이철의 평생에 걸친 그 갈증은 다른 이름을 얻는다. 남에게서 자기를 확인받으려는 마음이다.

옛 선사의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남에게 명예를 구하는 것은 매우 추한 일이라고(要人令譽, 亦孔之醜). 범부는 그것을 좋다 여기지만 성인은 허물로 여기니, 즐겁게 누리는 것은 잠깐이요 슬퍼하고 근심하는 것은 길다고. 레이철의 삶이 꼭 그렇다. 아버지의 인정, 남자들의 시선, 직장에서의 지위. 그녀는 평생 자기 가치를 바깥에서 구했다. 그리고 같은 글은 이렇게 잇는다. 명성은 두터우나 행함이 가벼우면 그 높은 자리는 빨리 무너진다고(名厚行薄, 其高速崩). 밖에서 빌려 세운 자기는 토대가 얕아 쉽게 흔들린다. 레이철의 당당함 아래 늘 불안이 흐르던 까닭이다.

그 글에 그림자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 그것들을 떨치려 달아났다. 그런데 달아날수록 그림자는 더 따라붙고 발자국은 더 늘어났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러다 나무 그늘에 단정히 앉으니, 그림자도 발자국도 비로소 사라졌다고(畏影畏迹, 逾走逾劇 / 端坐樹陰, 迹滅影沈). 레이철은 평생 달리는 사람이었다. 인정을 좇아 대상을 바꿔가며 달렸다. 한 사람이 봐주면 다음 사람을, 한 자리에 오르면 다음 자리를. 그런데 달릴수록 자기를 확인받고 싶은 갈증은 더 커졌다. 불교가 일러주는 출구는 단순하다. 멈추고, 자기 안에 앉는 것. 남의 눈이 아니라 자기 눈으로 자기를 보는 것. 레이철이 끝내 그 나무 그늘에 앉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성장이 맞느냐는 물음

지금까지의 네 렌즈는 한 점으로 모이지 않는다. 오히려 갈라진다.

프로이트는 인정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반복은 계속된다고 본다. 불교는 밖에서 자기를 구하는 마음이 그대로라고 본다. 이 둘은 레이철의 성장에 회의적이다. 그런데 융의 한쪽 눈은 그녀의 자아가 실제로 확장되었다고 본다. 응석받이에서 독립한 여자로, 일하는 사람으로, 누군가의 어머니로. 이건 분명 무언가 자란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비행기 장면이 그렇게 묘하게 남는다.

파리행을 포기하고 로스에게 돌아온 그 선택은, 한쪽에서 보면 퇴행이다. 어렵게 얻은 자립의 기회를 버리고 아버지 원형을 닮은 남자의 품으로 돌아간 것. 인정의 무대를 다시 익숙한 관계로 되돌린 것. 그런데 다른 쪽에서 보면, 그건 그녀가 처음으로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따라 내린 선택일 수도 있다. 부모가 정해서도, 누가 봐줘서도 아니라, 그냥 자기가 원해서 고른 첫 결정. 같은 장면이 퇴행으로도 읽히고 성장으로도 읽힌다.

나는 이 둘 중 하나로 답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 레이철이라는 인물의 진짜 핵심이 바로 이 갈라지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분명 자랐고, 동시에 그 자람이 진짜였는지는 끝내 확언할 수 없다. 사람의 성장이란 게 원래 그렇게 깔끔하게 판정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밖에서 자기를 찾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안에서 자기를 찾게 되는, 그런 선명한 전환은 현실에 잘 없다. 대개는 밖을 보던 눈으로 가끔 안을 들여다보는 정도의, 흐릿하고 더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밖에서 찾은 여자

다시, 그 거울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던 그 사람이 다시 떠오른다. 남의 눈으로 자기를 비춰 보던 그 눈빛.

진료실에서도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난다.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볼까요"를 먼저 묻는 사람들. 자기 몸의 신호보다 남의 평가가 늘 앞서는 사람들. 예전엔 그저 예민한 성격이려니 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어린 시절 누구의 눈을 그렇게 오래 살펴야 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 밖에서 자기를 찾는 버릇은 대개 그렇게 시작되니까. 그리고 그 버릇은 다그친다고 고쳐지지 않는다. 남의 눈을 그만 보라고 말하는 대신, 자기 눈으로 자기를 봐도 괜찮다는 걸 천천히 알아가게 하는 수밖에 없다.

레이철이 끝내 거기에 닿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 거울 앞에서 한 번이라도, 남이 아니라 자기를 비춰 본 순간이 있었기를 바란다. 여섯 사람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적고 보니, 결국 다들 같은 걸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괜찮은, 자기 자신으로 가만히 앉을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그늘 같은 것을.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