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제당 최원장의 인물노트
가라앉지 않는 여자 — 『노르웨이의 숲』 미도리

가라앉지 않는 여자 — 『노르웨이의 숲』 미도리

· 최장혁· 미도리

누군가는 늘 부엌에 있다. 가족이 식탁에 앉기 전에 먼저 일어나 국을 데우고 반찬을 덜고, 다 차려놓은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앉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저 사람은 언제 배가 고팠을까. 차리는 동안 식어버린 건 음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허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도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 부엌이 떠올랐다. 그녀는 늘 무언가를 차린다. 도시락을 싸 오고, 간사이식으로 상을 봐주고, 죽어가는 아버지의 입에 오이를 밀어넣는다. 받은 기억이 별로 없는 사람이 끝도 없이 차린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 몫으로는 사다 놓고 먹지 않을 딸기 쇼트케이크 같은 걸 요구한다. 먹고 싶다고 해서 사 왔는데 막상 안 먹겠다고 하면, 창밖으로 던져버려도 화내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갖고 싶다고. 처음엔 그저 발랄한 투정처럼 들린다. 그런데 자꾸 곱씹게 된다. 왜 하필 먹는 일이고, 왜 하필 던져버려도 되는 사랑일까.

프로이트라면

프로이트라면 미도리의 입을 봤을 것이다. 그는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사랑의 가장 오래된 형태가 입이라고 적었다. 젖을 빠는 일은 영양인 동시에 쾌락이고, 거기서 사랑과 먹는 일은 아직 갈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그는 이상한 말을 덧붙인다. 젖을 충분히 못 먹었다는 아이의 불만은 사실 여부와 거의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발견되며, 그 최초의 허기는 본질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고. 젖을 잃은 고통을 사람은 영영 다 극복하지 못한다고. 그 부족을 아이는 한 가지로 번역한다 — 사랑이 부족했다.

미도리는 그 입을 어른의 몸으로 가지고 다닌다. 그녀는 사랑을 먹는 일로 말한다. 도시락을 싸 오고, 상을 차리고, 병상의 아버지 입에 오이를 넣는다. 받은 적 없는 사람이 끝없이 먹인다. 그리고 자기 몫으로는 먹지 않을 케이크를 요구한다. 프로이트라면 그 케이크가 결국 젖이라고 했을 것이다. 사랑이 무르익는 자리에서 연인들이 “널 깨물어 먹고 싶다"고 말하듯, 미도리가 와타나베에게 원하는 것도 그를 먹어서 제 안에 넣는 일에 가깝다. 채워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은 닫히지 않는다. 던져버려도 화내지 않을 사람을 원한다는 건, 결국 던져버려도 사라지지 않을 젖을 원한다는 말이다. 한 번도 그렇게 사랑받지 못했기에, 사랑을 그렇게 터무니없는 크기로밖에 상상하지 못한다.

융이라면

융이라면 다른 데를 짚었을 것이다. 미도리가 죽음과 성을 농담처럼 던질 때, 보통 사람이 황급히 덮어두는 것을 그녀는 입 밖으로 꺼내 보인다. 자기가 어떤 야한 상상을 하는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를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한다. 융은 그런 어두운 부분을 그림자라고 불렀다. 짐승의 본능과 열등하고 부끄러운 것들이 모인 자리. 그것을 부인하면 사람은 납작해지고 실체를 잃는다고 그는 적었다.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고서 어떻게 무게를 가지겠는가, 하고. 그림자에 yes라고 말하는 것이 사람을 완벽이 아니라 온전함으로 데려간다고.

이 대목에서 미도리는 나오코의 거울처럼 보인다. 나오코는 자기 안의 어두운 것을 끝내 끌어안지 못하고, 억눌린 것이 안에서 곪다가 결국 무너진다. 미도리는 같은 어둠을 입 밖으로 꺼내 살아낸다. 그래서 미도리에게는 나오코에게 없는 삼차원의 무게가 있다. 다만 융은 여기서 칼날 하나를 함께 내민다. 어둠을 꺼내 보이는 것과 어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은 다르다고. 제 그늘을 과시하거나 우울과 죄책감에 탐닉하는 일은 대단히 유혹적이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기만이며 진짜 직면을 가린다고. 진짜 통합은 막대한 도덕적 수고를 치러야만 온다고. 그렇다면 미도리의 그 거침없는 솔직함은 어느 쪽일까. 그림자를 끌어안은 것일까, 아니면 그림자를 전시함으로써 더 깊은 어딘가를 가린 것일까. 나는 끝까지 한쪽으로 정하지 못한다.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미도리의 활기가 진짜이면서 동시에 벽이듯이.

불교라면

동양 쪽으로 건너오면 같은 갈망이 다른 얼굴을 한다. 불교는 이것을 갈애라 부른다. 잡아함경의 어느 대목에서 부처는 갈애를 두고 그물이 되고 아교가 되며 샘물이 되고 연뿌리가 된다고 말한다. 한번 걸리면 풀리지 않고, 손에 쥐어도 끈끈하게 들러붙고, 메워도 다시 솟는다. 또 다른 경에서는 그것이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한다고 적는다. 프로이트가 미도리의 허기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한다면, 불교는 그 허기가 결코 닫히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말한다. 케이크를 사 줘도, 와타나베가 곁에 있어도, 미도리의 갈망은 충족으로 끝나지 않는다. 채워지는 순간 다음 갈망이 솟기 때문이다. 갈애의 무서움은 대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대상이 아무리 채워져도 갈애 자체는 줄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도리가 가엾은 건 사랑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받아도 그 입이 닫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심학이라면

여기까지 오면 한의사로서 나는 이제마를 떠올린다. 그의 사상심학은 사람의 성정을 네 갈래로 보는데, 미도리의 거침없음과 솔직함과 바깥으로 뻗는 활기는 소양인의 결을 닮았다. 이제마는 소양인에게 도량이라는 능력을 둔다. 자기가 본 것과 느낀 것을 부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가늠해 상대에게 건네는 힘이다. 그런데 이 도량이 미끄러지면 과심이 된다. 본 것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려 전하는 마음. 이제마를 풀어 읽은 이는 그것을 제법 큰 참새를 독수리만 했다고 말하는 버릇에 빗댄다. 사실보다 크게 말해 자기를 그럴듯하게 보이려는 것이다.

미도리의 그 유명한 요구를 여기에 겹쳐 본다. 그저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을, 미도리는 창밖으로 던져도 화내지 않는 사람이라는 독수리만 한 크기로 부풀려 말한다. 평범한 애정을 평범하게 청하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형상으로 키워 내민다. 직설적인 성담론도 그렇게 읽을 여지가 있다. 나를 봐 달라는 말을, 도발의 크기로 키워 던지는 것이다. 다만 나는 미도리를 과심 하나로 닫고 싶지 않다. 이제마가 본 소양인의 또 다른 자리는 재간이다. 몸을 움직여 세상에 실제로 무언가를 해내는 힘. 미도리는 그 재간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그녀는 주저앉지 않는다. 부풀려 말하면서도 끝내 상을 차리고, 병상을 지키고, 살아서 움직인다. 과장은 그 활력의 그림자일 뿐, 활력 자체를 지워버리지는 않는다.

가라앉지 않는 여자

그런데, 이게 다 그 사람 안에서 일어난 일일까

그런데 이 네 권의 책을 덮고 나면, 한 가지가 자꾸 걸린다. 이게 다 미도리 안에서만 일어난 일일까. 채워지지 않는 입도, 꺼내 보이는 그림자도, 닫히지 않는 갈애도, 부풀리는 버릇도, 전부 미도리라는 한 사람의 안쪽 사정으로만 읽으면, 결국 미도리는 애정에 굶주린 결함 많은 여자가 된다. 그런데 미도리가 그 입을 갖게 된 자리를 생각하면 그 결론은 어딘가 부당하다.

이제마는 사람이 놓인 자리가 그 사람의 능을 명한다고 적었다. 미도리가 놓인 자리는, 가난을 감추며 부유한 아이들 사이에서 겉돌던 교실이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병상에서 떠나보낸 어린 딸의 자리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받는 법을 가르쳐줄 새 없이, 자리가 먼저 그녀에게 차리는 역할을 떠맡겼다. 격치고를 펼치면 이제마는 더 매서운 말을 한다. 어떤 힘이 내게 있으면 사람들이 내게 다가오고, 그러면 나는 반드시 빼앗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고. 그 문장에서 ‘반드시’가 두 번 박혀 있다. 이건 그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자리가 그런 행동을 강요한다는 뜻이다. 미도리에게 배정된 역은 차리는 자였고, 차리는 자는 결국 받지 못한 채 굶는다. 미도리의 허기는 그녀가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자리가 그녀에게 굳혀준 것이다.

이제마는 그래서 사람의 비뚤어짐을 종자로 보지 않았다. 같은 물이 산속에서는 샘물이고 강가에서는 강물이고 바다에서는 바닷물이듯, 한 사람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굳었는가의 문제일 뿐이라고. 미도리의 굶주림도 그녀라는 종자의 결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렇게 굳은 물의 모양이다. 그러니 미도리를 결함 많은 여자로 닫는 읽기는, 자리가 강요한 굳음을 그녀 한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미도리의 활기는 무엇인가. 이제마에게는 반성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다시 착해진다는 뜻으로 읽지만 그가 쓴 결은 다르다. 굳은 길로 흘러 들어가기 직전에, 다른 상으로 떠오르는 것. 가라앉기 전에 증발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한 번 도달하면 끝나는 완성이 아니다. 그는 쉰일곱 살에도 여전히 속이는 마음을 못 버렸다고 고백하며, 매번 졌고 매번 다시 돌아왔다고 적는다. 도달점은 없다. 매 순간 떠오르는 그 기울기만이 전부다.

미도리의 명랑을 나는 거기에 둔다. 그것은 상처가 다 나아 평온해진 사람의 웃음이 아니다. 슬픔이 굳어 가라앉으려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매번 다른 상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이다. 그래서 미도리의 활기는 완성이 아니라 진행이다. 나오코가 자기 안의 어둠으로 끝내 가라앉을 때, 미도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구원에 도달해서가 아니다. 가라앉으려는 그 순간마다, 다시 한 번 떠오르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 번 떠올랐다고 끝이 아니라서, 그녀는 내일도 또 떠올라야 한다. 그 끝없는 떠오름이 미도리의 활기의 정체다.

다시, 부엌

다시 부엌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위해 상을 차리고 마지막에 앉는 사람. 이제 나는 그 사람이 단지 배고픈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굶주린 채로도 매일 다시 일어나 불을 켜는 사람, 가라앉을 자리에서 매번 한 번 더 떠오르기로 하는 사람. 미도리는 그 부엌에 여전히 서 있다. 식어버린 자기 몫의 허기를 안은 채로, 그래도 오늘 또 누군가의 상을 차리면서.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