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일요일이었고, 나는 진료가 없는 날의 오후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었다. 미지근한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별 생각 없이 오래된 시트콤을 다시 틀었다. 여섯 명의 친구가 나오는 그 드라마.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다. 익숙한 장면이 익숙한 자리에서 흘러가는 걸 보는 일에는 묘한 안정감이 있다.

그날 눈에 들어온 건 박사 학위를 가진 그 남자였다. 공룡을 연구하는, 말끝마다 자기가 옳다는 걸 증명하려 드는 남자. 한 여자를 십 년 가까이 놓지 못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남자. 화면 속에서 그는 또 질투에 휩싸여 있었다. 그 여자 곁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득 궁금해졌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놓지를 못할까. 커피가 식는 동안, 나는 몇 개의 오래된 책을 머릿속에서 꺼내 보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라면

프로이트라면 이걸 애도의 실패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의 표준판 어딘가에, 애도와 멜랑콜리를 나란히 놓은 글이 있다. 사랑하던 대상을 잃었을 때, 건강한 사람은 천천히 그 대상에 묶였던 마음을 거두어들인다. 고통스럽지만, 결국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잃어버린 대상을 자기 안으로 끌고 들어와 버린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두고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에 드리워진다고 썼다.

그 남자가 꼭 그렇다. 헤어진 연인은 떠났는데, 그는 그 사람을 자기 안에서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 여자의 모든 것이 여전히 그를 흔든다. 곁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그는 무너진다. 프로이트는 질투를 세 겹으로 보았다. 사랑을 잃을지 모른다는 슬픔, 자존심에 난 상처, 그리고 라이벌을 향한 적의. 그런데 이 정상적인 질투조차 사실은 이성적인 게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그 뿌리는 아주 어린 시절, 오이디푸스적인 자리, 혹은 형제와의 경쟁에 닿아 있다고.

이 대목에서 나는 잠깐 멈췄다. 형제와의 경쟁. 그 남자에게는 여동생이 있다. 늘 비교당하고, 부모의 인정을 두고 평생 겨뤄온 여동생이.

프로이트에게는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반복강박. 쾌락원칙을 넘어서, 아무 즐거움도 주지 않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굳이 되풀이하려는 맹목적인 충동.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 썼다. 모든 관계가 같은 방식으로 끝나고, 마치 악마적인 운명에 쫓기듯 평생 같은 불행을 반복하는 사람들. 그 남자의 연애사를 떠올리면, 이 문장이 조금 서늘하게 다가온다. 그는 매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넘어진다.

융이라면

융은 다른 각도에서 봤을 것이다.

먼저 페르소나. 그 남자는 박사이고, 박물관의 연구자이고, 늘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사람이다. 융은 자아가 자기 직함과 사회적 역할에 완전히 달라붙어 버리면 팽창이 일어난다고 했다. 자기가 가진 지식과 지위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상태. 그런데 융은 거기에 대가가 따른다고 봤다. 겉으로 완벽한 페르소나를 쌓아 올린 사람은, 사적인 자리에서 짜증과 신경질로 그 균형값을 치른다. 그 남자가 친구들 앞에서 보이는 옹졸함, 사소한 일에 발끈하는 모습은 바로 그 청구서 같다.

그다음은 그림자. 융에게 그림자는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 억눌러둔 열등하고 어두운 부분이다. 그런데 이게 의식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억압되면, 감정적인 자율성을 띤다고 그는 경고했다. 강박적이고 소유적인 성질을 띠고, 결국 바깥의 누군가에게 투사된다는 것이다. 융은 알코올 중독자의 질투를 예로 들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을 잃은 무의식이 그것을 보상하려다 실패하면 맹목적인 질투로 변질되고, 끝내 행동으로 폭발한다고. 그 남자가 연인의 직장 동료를 향해 보였던 비이성적인 적대감을 떠올리면, 이 그림자라는 단어가 꽤 잘 맞는다.

세 번째는 아니마. 융은 남자가 자기 무의식 속 여성성을 현실의 특정 여성에게 통째로 투사할 때, 그 여자에게 무의식에 묶인 것과 똑같은 강도로 매여버린다고 했다. 객관적인 관계가 불가능해지고, 리비도가 울체되어 격렬한 감정의 폭발을 일으킨다고. 그 남자에게 그 한 여자는 더 이상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다. 그의 영혼 전체가 걸린 수수께끼다. 그래서 놓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개성화. 융이 그린 성숙의 길은,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을 끌어안으며 자기보다 더 큰 전체, 곧 자기(Self)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게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융은 원형적인 이미지의 매혹에 사로잡힌 사람이 유아기적 패턴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고 썼다. 앞으로 흘러가야 할 마음이 자꾸 같은 자리로 퇴행하는 것이다. 그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같은 사랑을, 같은 방식으로, 몇 번이고 다시 산다.

사상심학이라면

여기서부터는 내 전공의 언어로 그를 본다.

이제마의 사상심학에는 체질마다 타고난 기능이 있고, 그 위에 빌려 쓰는 기능이 있다. 나는 그 남자를 태음인으로 본다. 그리고 그가 빌려 쓰는 것은 소음기다.

사상심학의 도식에 태음성 소음기라는 자리가 있다. 태음인이 제2의 기능인 소음기를 보완하면 거처라는 재주를 갖게 된다고, 신정거처라 하여 그렇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 인사(人事) 차원의 소음기는 묘한 성질을 띤다. 원문은 그것을 사람 사이의 갈등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하려는, 오악(惡惡)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마음이라고 적는다.

갈등을 피하고 자신을 보호한다. 이 한 줄이 그 남자를 설명한다. 그는 늘 피해자의 자리에 선다. 세상이 자기를 부당하게 대한다고 느끼고, 잘못은 언제나 바깥에 있다. 사상심학은 이렇게 빌려 쓴 기능이 게을러지면 사심(邪心)으로 흐른다고 본다. 본래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빌린 자리에 눌러앉을 때,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비뚤어진 마음을 키운다. 그 남자가 평생 짊어진 인정 욕구와 피해 의식은, 빌린 기능에 너무 오래 머문 사람의 그늘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건 그의 여동생이다. 같은 집에서 자란 그 여동생도 인정을 향한 같은 뿌리를 가졌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뻗었다. 오빠는 피해와 호소로, 동생은 통제와 완벽으로. 같은 상처가 두 갈래로 갈라진 셈이다.

불교라면

가장 깊은 데까지 내려가면, 불교가 있다.

잡아함경은 바른 견해를 둘로 나눈다.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으면서 그저 좋은 세계로 향하는 견해와, 번뇌도 집착도 없어 괴로움의 끝으로 향하는 견해. 같은 경전이 거듭 말하는 것은 단순하다. 집착(取)이 있으면 괴로움으로 가고, 집착을 놓아야 괴로움이 끝난다는 것.

그 남자의 문제는 결국 이 한 글자다. 取. 놓지 못함.

그는 떠난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잃은 인정을 놓지 못하고, 옳다는 자기 확신을 놓지 못한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이 모든 것이 같은 뿌리다. 대상을 향한 갈애와, 그것이 변하고 끝난다는 사실(無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 중아함의 라운경은 욕심에 따라오는 환란을 욕환(欲患)이라 불렀다. 무언가를 손에 쥐려는 마음 자체가 이미 괴로움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융이 원형을, 사상심학이 빌린 기능을 말할 때, 불교는 더 멀리 간다. 놓지 못하는 그 손이 바로 苦라고. 그 남자는 무언가를 쥐고 있어서 불행한 게 아니라, 쥐려는 그 동작을 멈추지 못해서 불행하다.

놓지 못하는 남자

네 개가 모이고, 하나가 어긋난다

여기까지 오면 네 개의 렌즈가 한 점으로 모인다.

프로이트의 멜랑콜리, 융의 개성화 실패, 사상심학의 빌린 기능, 불교의 取. 언어는 다 다른데 가리키는 곳은 같다. 그 남자는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 놓지 못함이 곧 그의 병이자 괴로움이다. 네 전통은 입을 모아 같은 처방을 내린다. 놓아라. 거두어들이고, 통합하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고, 손을 펴라. 길은 모두 그 남자의 안쪽을 향한다. 고쳐야 할 것은 그의 내면에 있다.

그런데 다섯 번째 렌즈가 이 합의를 살짝 깨뜨린다.

지라르라면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 욕망이 정말 그의 것인가.

지라르의 모방 이론에서 인간의 욕망은 자발적이지 않다. 우리는 대상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원한다. 욕망은 늘 삼각형이다. 나와 대상 사이에 언제나 모델이 끼어 있고, 진짜 화살표는 대상이 아니라 그 모델을 향한다. 그리고 그 모델이 나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 모델은 곧 경쟁자가 된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경쟁은 더 격해진다.

이 눈으로 보면 그 남자의 집착은 그의 내면에서 솟은 게 아니다. 그가 그 여자를 가장 강렬하게 원하는 순간은 언제나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원할 때다. 라이벌이 나타나면 식었던 마음이 다시 타오른다. 지라르라면 그게 사랑이 아니라 모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을 따라다닌 형제와의 경쟁, 그 인정 다툼이야말로 모방 욕망의 가장 오래된 원형이라고.

여기서 다섯 번째 렌즈는 다른 넷과 갈라선다. 프로이트도 융도 사상심학도 불교도, 결국 그 남자의 안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문제를 찾는다. 놓지 못하는 그 손, 그 마음, 그 기능. 그런데 지라르만은 다른 데를 가리킨다. 고쳐야 할 내면이 처음부터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고. 그의 욕망은 라이벌에게서, 형제에게서, 그를 둘러싼 관계의 구조에서 빌려 온 것이라고. 손을 펴라는 네 전통의 처방 앞에서, 지라르는 조용히 되묻는다. 그 손에 쥔 것이 애초에 누구의 것이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겠냐고.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커피는 다 식었고, 화면 속 남자는 또 같은 표정으로 같은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리모컨을 들었다가, 그냥 한 편을 더 보기로 했다. 그가 또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걸, 다섯 개의 눈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