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 넣어 둔 마지막 한 조각을 누가 말없이 먹어 치운 걸 알았을 때, 나는 생각보다 크게 화가 났다. 별것도 아닌 빵 한 조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의 옹졸함이 우스워서 혼자 피식 웃다가, 늘 그렇듯 한 남자가 떠올랐다. 자기 음식에 누가 손대는 걸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디던 남자. 조이 트리비아니.

처음 그를 봤을 때는 그냥 단순한 캐릭터인 줄 알았다. 잘생긴 배우 지망생, 오디션은 늘 떨어지고 통장은 늘 비어 있고, 머릿속엔 음식과 여자뿐인 남자. 그런데 그 시트콤을 몇 번이고 다시 보는 동안 이상한 게 하나 걸렸다. 여섯 명이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고장 나 있는데—누구는 사랑 때문에, 누구는 일 때문에, 누구는 그냥—저 남자만 멀쩡했다.

가난과 거절이 차고 넘치는 인생인데, 방금 차였는데도 별로 슬프지 않은 얼굴로 다음 여자 얘기를 한다. 나머지 다섯이 각자의 신경증을 앓는 동안 저 사람만 아무것도 앓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멀쩡한 게 아니라 멀쩡해 보이는 거라면, 그 멀쩡함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빵 한 조각에 화났던 게 머쓱해지도록, 나는 그 남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막히지 않은 남자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저 사람한테는 상처가 없나.

그럴 리가 없다. 조이는 이탈리아계 대가족의 아들로 가난하게 자랐고, 학력은 낮고, 배우로서는 늘 거절당한다. 결핍이라면 차고 넘친다. 정신분석이 즐겨 다루는 재료가 다 모여 있다. 프로이트라면 이 남자를 보고 한 번쯤 손을 비볐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의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현실이 욕망을 막을 때, 그 좌절(frustration) 때문에 병이 든다고. 증상이란 삶에서 놓친 것을 대신 채우는 대체만족이라고. 다만 그가 곧바로 덧붙인 단서가 중요하다. 결핍을 겪는다고 모두가 병드는 것은 아니다. 같은 박탈 앞에서 누구는 신경증으로 가고 누구는 가지 않는다. 갈림길에 있는 건 결핍의 크기가 아니라, 그 욕동을 억압하느냐 아니냐다.

프로이트가 든 예가 하필 입이었다. 어린 시절 입술에 머물던 쾌감이 어른까지 이어질 때, 거기에 억압이 걸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병으로 가지 않는다. 대신 키스에 탐닉하는 사람이 되거나, 술과 담배를 즐기는 사람이 된다. 욕동을 비틀거나 숨기지 않고, 그냥 무해한 방식으로 곧장 흘려보내는 것이다. 반대로 그 입의 욕동에 자아가 방어를 걸기 시작하면, 같은 자리에서 음식에 대한 혐오가 생기고 히스테리성 구토 같은 증상이 올라온다.

조이를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이 남자의 평생 화두가 음식이다. 누가 자기 음식에 손대는 걸 못 견디고, 샌드위치 하나에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여자를 좋아하는 방식도 음식을 좋아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핍 콤플렉스가 입을 통해 그대로 흘러나오는데, 그게 억압을 만나지 않으니 증상이 되지 못한다. 부끄러움이 없으니 비틀릴 일도 없다. 가난과 거절이 그 안에서 신경증으로 응고되지 않고, 피자와 농담과 다음 연애로 그냥 빠져나간다.

다만 프로이트의 언어를 끝까지 따라가면 조금 서늘해진다. 그는 욕동을 더 높은 가치로 돌리는 일을 승화(sublimation)라 불렀다. 막힌 에너지를 예술이나 탐구로 끌어올리는 것. 그런데 조이가 하는 건 승화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따로 구분해 둔 다른 길, 본능이 아무 변형 없이 그대로 연장되는 쪽이다. 조이는 자기 결핍을 무언가 더 높은 것으로 닦아 올린 적이 없다. 그저 막히지 않았을 뿐이다. 건강한데, 그 건강이 노력의 결과는 아니다. 이 지점을 적어 두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가면이 없는 남자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저 사람은 연기를 직업으로 하는데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연기를 안 하는 것 같다는 거였다.

융이라면 이걸 페르소나 이야기로 받았을 것이다. 페르소나는 우리가 세상에 내거는 얼굴, 사회가 요구하는 배역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대개 그 가면과 진짜 자기 사이에서 균열을 앓는다는 데 있다. 가면이 너무 두꺼우면 속이 비고, 가면을 자기라고 착각하면 팽창(inflation)이 온다. 그 틈에서 신경증이 자란다.

조이한테는 그 틈이 잘 안 보인다. “섹시하고 재미있는 배우"라는 그의 페르소나는, 놀랍게도 그의 알맹이와 거의 포개진다. 보이는 게 전부고, 전부가 보인다. 다른 인물들이 열심히 숨기는 것들—식탐, 성욕, 게으름, 단순함—을 조이는 그림자로 억누르지 않고 그냥 햇빛 아래 꺼내 놓는다.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끌리면 끌린다고 한다. 남들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한 겹 덮어 두는 자리에서 그는 한 번도 자기를 검열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무례해 보이지만, 이상하게 비열해 보이지는 않는다. 숨기는 게 없는 사람에게는 음흉할 구석도 없기 때문이다. 융의 말을 빌리면, 그림자를 동화한 사람은 환상에 짓눌리지 않는 실체를 얻는다. 빛만 가진 완벽함(perfection)이 아니라 어둠까지 끌어안은 완전함(completeness) 쪽으로 간다. 조이는 그 완전함에 꽤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결론이 너무 곱게 나는 것 같아서 멈췄다. 융을 더 읽다 보면 그가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 의외로 차갑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연 그대로 사는 사람의 온전함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딱히 감탄할 것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건 그저 옛날부터 거기 있던 무의식이고 무관심일 뿐이라고. 자기 신경증을 아는 신경증 환자가, 자기 본성에 더없이 행복하게 무지한 사람보다 더 개성화된 사람이라고. 융에게 개성화의 기준은 평온이 아니라 의식이었다.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과하며 그것을 보는 것.

그러면 조이의 온전함은 어느 쪽인가. 평생 자기를 닦아 도달한 의식의 온전함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거기 있던 자연의 온전함인가. 답은 너무 분명해서 좀 미안할 정도다. 조이는 자기 그림자를 통찰해서 받아들인 게 아니다. 애초에 그것과 분리된 적이 없을 뿐이다. 가면이 없는 게 아니라, 가면을 쓸 만큼 자기를 의식한 적이 없는 것에 가깝다. 멀쩡한 게 맞는데, 그 멀쩡함은 통과가 아니라 미통과의 멀쩡함이다.

겁이 고요한 남자

여기서부터는 직업병이 나온다. 한의사로 십수 년을 진료하다 보면 사람을 체질로 먼저 읽게 된다. 조이는 누가 봐도 태음인이다. 크고 듬직한 몸, 익숙한 자리에서 가장 편안해지는 사람, 변화를 싫어하고 자기 소파와 자기 친구들과 자기 동네 안에서 최고로 기능하는 사람. 간에 흡취(吸聚)의 기운이 강해 무엇이든 끌어모아 쌓는—음식이든, 관계든, 그 소파든.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태음인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太陰人恒有怯心, 태음인은 늘 겁심을 품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줄이 이어진다. 怯心寧靜則居之安資之深而造於道也. 그 겁심이 고요해지면, 거처가 편안해지고 바탕이 깊어져 도(道)에 나아간다. 반대로 怯心益多則放心桎梏而物化之也, 겁심이 많아지면 마음이 질곡에 빠져 사물에 매여 버린다. 더 심해져 파심(怕心)에 이르면 정충(怔忡)이라는 중한 병이 된다.

이 문장을 조이 위에 포개면 소름이 돋는다. 태음인의 건강은 겁심이 고요한 자리, 곧 居之安—제 거처에서 편안한 상태다. 조이의 삶이 정확히 그렇다. 그는 낯선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익숙한 소파 위에서, 새 도전이 아니라 늘 오던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자기답다. 겁심이 사납게 날뛰지 않는다. 같은 태음인인 로스가 겁심을 끌어안고 끝없이 곱씹다가 物化의 자리로—한 사람에게, 한 후회에 매여 신경증으로—흘러갈 때, 조이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겁이 고요한 쪽에 머물렀다.

그런데 원전을 더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걸린다. 첫째, 이제마는 居之安의 끝을 造於道, 도에 ‘나아간다’고 썼지 도에 ‘이르렀다’고 쓰지 않았다. 나아감은 과정이다. 둘째, 사상심학은 태음인의 기본 정서인 희(喜)를 곧이곧대로 기쁨으로 읽지 않는다. 어떤 해석은 그 웃음을, 진짜 마음이 만족해서 나오는 웃음이 아니라 놀란 것을 무의식적으로 덮으며 웃어넘기는 자기방어로 본다. 그렇게 읽으면 조이의 그 환한 웃음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늘 웃는 그 얼굴이 향유인가, 아니면 놀람 앞에서 먼저 켜지는 방어인가. 레이첼을 향한 감정이 생겼을 때—생애 처음으로 한 대상에 마음이 고착됐을 때—조이가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회피로 덮어 버린 장면을 떠올리면, 후자가 영 틀린 말 같지 않다.

거기서 더 갈 데가 없다는 것

세 렌즈를 나란히 놓고 보니 묘하다. 셋 다 조이가 건강하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없어 증상이 없다 하고, 융은 그림자와 싸우지 않아 분열이 없다 하고, 사상심학은 겁심이 고요해 거처가 편안하다 한다. 진단은 일치한다. 이 남자는 아프지 않다.

그런데 세 렌즈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자리에서 멈칫한다. 프로이트의 건강은 승화가 아니라 막히지 않은 본능의 연장이었다. 융의 온전함은 의식을 통과한 개성화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무의식이었다. 사상심학의 편안함은 도에 이른 것이 아니라 도를 향해 나아가는 길목이었다. 세 번 다 같은 말이다. 이건 도달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닦아서 도달한 온전함과 닦지 않고 타고난 온전함은 겉이 똑같다. 평온해 보이고, 흔들리지 않아 보이고, 부럽다. 그런데 둘은 같지 않다. 한쪽은 갈등을 통과해 돌아온 고요이고, 다른 한쪽은 갈등 앞에 서 본 적이 없는 고요다. 통과한 사람은 다음 갈등 앞에서도 길을 안다. 통과한 적 없는 사람은, 그 자리가 무너지면 처음부터 다시다. 조이가 레이첼 앞에서 그토록 무력했던 건 그래서일 것이다. 한 번도 겪지 않은 깊이가 닥치자, 그가 가진 건강은 길을 알려 주지 못했다.

그래서 조이는 나머지에게 모범이 되지 못한다. 부러움의 대상은 될 수 있어도 스승은 될 수 없다. 그가 사는 그 자리는 가르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력으로 도달한 곳이 아니니, 노력하는 사람에게 길을 내줄 수가 없다. 타고난 것은 물려줄 수 없다. 그건 조이의 한계가 아니라 그냥 타고난 것의 속성이다.

그냥 거기 있는 남자

다시, 빵 한 조각

그날 내가 빵 한 조각에 화가 났던 건, 어쩌면 그게 내 것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그걸 아껴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껴 둔다는 건 닦는 일과 닮았다. 지금 안 먹고 남겨 두는 것, 지금 안 풀고 견디는 것. 조이는 아껴 두지 않는다. 좋으면 지금 먹고, 끌리면 지금 말하고, 차이면 지금 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빼앗길 마지막 한 조각도, 곱씹을 미련도 잘 남지 않는다.

가끔 저런 사람이 부럽다. 나처럼 자기를 닦아야 겨우 가닿는 자리에, 누군가는 그냥 처음부터 앉아 있다. 진료실에서 만나는 어떤 환자들도 그렇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건강하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편안하다. 부럽고, 동시에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그건 그가 거기서 더 갈 데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닦는 사람은 느리지만 어디론가 간다. 타고난 사람은 빠르지만 이미 다 와 있다. 다 와 있다는 건 더 갈 곳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날, 빈 접시를 치우면서 나는 닦는 쪽을 택한 내 인생이 그렇게 손해는 아니라고 조용히 생각했다. 조이는 그런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게 그의 복이고, 그의 천장이다.

— 최장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