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문을 닫고 나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옛날 시트콤을 다시 튼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캔맥주 하나, 십몇 년 전 미국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여섯 명의 수다. 별 의미는 없다. 그냥 하루의 끝을 무디게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그날은 한 남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챈들러 빙. 회계 비슷한 일을 하는데 정확히 뭘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진지해지려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농담을 던지는 남자. 친구가 울먹이며 속내를 털어놓으면 그는 위트로 받아친다. 사람들은 웃는다. 그리고 진지한 순간은 그렇게 흩어진다.

처음엔 그냥 웃겼다. 두 번째 보니 조금 이상했다. 세 번째쯤 되니, 나는 맥주를 내려놓고 그 남자를 직업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지금 뭔가를 피하고 있구나.

그래서 며칠 동안, 나는 가진 렌즈를 하나씩 꺼내 그에게 대 보기로 했다.

첫 번째 렌즈 — 농담은 무엇을 막고 있나

프로이트라면 이걸 뭐라고 불렀을까.

그는 농담을 꽤 진지하게 연구한 사람이다. 농담과 익살과 유머를 구분하면서, 각각이 어디서 쾌감을 끌어오는지를 따졌다. 그중 유머에 대한 그의 말이 오래 남는다. 유머란 고통스러운 감정이 끼어들 자리에 대신 들어앉는 것이라고. 원래대로라면 두려움이나 분노나 절망이 일어나야 할 상황에서, 그 감정이 일어나는 데 쓰일 에너지를 아껴버리는 일이라고 그는 봤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슬퍼해야 할 자리에서 농담을 하면, 슬픔에 쓸 힘이 굳이 나오지 않는다. 그 아낀 힘이 웃음으로 터진다. 챈들러가 친구의 눈물 앞에서 농담을 할 때, 그는 친구를 위로하는 게 아니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려는 감정을 미리 차단하는 것이다. 농담은 방패다.

프로이트가 무서운 말을 한 건 그다음이다. 그는 유머를 인간이 가진 방어 중 가장 높은 자리에 놓았다. 고통을 억지로 의식에서 밀어내는 억압과 달리, 유머는 고통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 감정만 쏙 빼버린다. 그래서 고상하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유머는 인간이 고통의 강요에서 벗어나려고 만든 방법들의 계열에 속하는데, 그 계열은 신경증에서 시작해서 광기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농담하는 남자는, 그러니까, 그 계열의 입구쯤에 서 있는 셈이다.

두 번째 렌즈 — 가면과 그 뒤의 사람

같은 장면을 융의 눈으로 다시 본다.

융에게는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있다. 라틴어로 배우의 가면을 뜻하는 말. 우리가 사회에 나갈 때 쓰는 얼굴이다. 융은 페르소나를 두고 개인과 사회가 맺은 일종의 타협이라고 했다. 한쪽으로는 남에게 일정한 인상을 주고,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의 진짜 본성을 가리는 것. 문제는 가면 자체가 아니다. 가면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가면과 자신을 똑같다고 믿어버릴 때 생긴다.

챈들러의 가면은 ‘재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한 줄 받아칠 말을 가진 남자. 그게 그의 사회적 얼굴이고, 그는 그 얼굴로만 산다. 융은 이렇게 동일시가 일어나면 진짜 개성은 무의식 속으로 떨어지고, 그 사람은 자기가 연기하는 역할 자체가 되어버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좀 가혹한 표현을 쓴다. 그 껍데기 뒤를 들춰보면 아주 가련하고 작은 존재가 있을 뿐이라고.

재치 뒤에 가련하고 작은 존재. 시트콤이 가끔 슬쩍 보여주는 챈들러의 진짜 얼굴이 딱 그렇다. 사랑 앞에서 도망치고, 버림받을까 봐 먼저 망가뜨리고, 혼자 남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남자. 가면이 화려할수록 그 뒤는 비어 있다.

세 번째 렌즈 — 빌려 쓴 기능

여기서부터는 내 전공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나는 한의사고, 사상의학을 공부한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체질로 읽는 사상심학이라는 갈래를 들여다본다.

사상심학에는 기능 차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람은 타고난 우월한 기능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그걸 제대로 쓰지 못하면 약한 기능을 억지로 끌어다 주력으로 삼는다. 본성과 반대로 사는 것이다. 이제마는 음인의 기운이 위로 치솟는 것을 역동이라 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라는 뜻이다.

챈들러를 굳이 이 틀에 얹어 본다면 —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이다 — 그는 본래 사고가 깊은 사람인데, 그 깊은 사고로 상황을 마주하는 대신 즉석에서 튀어나오는 감정적 재치를 끌어다 쓰는 쪽으로 굳어진 사람으로 보인다. 사상심학은 이렇게 약한 기능을 억지로 주력으로 쓰면 정신의 긴장과 소모가 심해지고, 끝내 몸의 부조화로까지 간다고 말한다.

더 마음에 걸리는 건 탈심이라는 말이다. 새로운 것을 깊이 궁리해 바른 판단에 이르는 대신, 대충 이런 거지 하고 서둘러 판단을 닫아버리는 마음. 챈들러의 위트가 정확히 그렇다. 그는 깊이 들어가야 할 순간마다 재빠른 한 줄로 상황을 닫는다. 빌려 쓴 기능으로 사는 사람의 피로가, 그 가벼운 농담 밑에 깔려 있다.

자정의 거실, 꺼지지 않은 텔레비전
자정의 거실. 농담이 끝나도 불은 잘 꺼지지 않는다.

네 번째 렌즈 — 끊지 못한 한 가지

마지막으로 가장 깊은 데까지 내려가 본다. 불교의 눈이다.

중아함경에 사자후경이라는 짧은 경이 있다. 거기서 붓다는 네 가지 집착을 말한다. 욕심에의 집착, 규율에의 집착, 견해에의 집착, 그리고 나에의 집착. 흔히 사취라 부르는 것이다. 경은 흥미로운 말을 한다. 앞의 셋을 끊는다고 말하면서 마지막 ‘나에의 집착’을 끊는 걸 말하지 않는 자는, 사실 아무것도 제대로 끊지 못한 것이라고. 네 집착의 뿌리는 모두 무명, 곧 어두움 하나라고.

챈들러가 끝없이 갈망하는 걸 떠올려 본다. 인정받고 싶고, 웃기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걸 자기 손으로 밀어낸다.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질 수 없다.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는 욕망의 대상을 바꿔가며 쫓고 있을 뿐, 정작 그 모든 갈망이 매달려 있는 ‘나’라는 못을 한 번도 건드리지 못했다. 농담으로 욕심을 달래고, 관계로 외로움을 달래도, 그 밑의 ‘나에의 집착’이 그대로 있는 한 갈증은 돌아온다. 경의 말대로, 가장 중요한 하나를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렌즈가 만나는 자리, 그리고 갈라지는 자리

네 개의 렌즈를 차례로 대고 나니, 신기하게도 같은 그림이 겹쳐 떠올랐다.

프로이트는 그가 농담으로 고통을 피한다고 했다. 융은 그가 가면으로 진짜 자기를 가린다고 했다. 사상심학은 그가 빌린 기능으로 깊은 사고를 모면한다고 했다. 불교는 그가 ‘나’를 끊지 못해 갈망을 반복한다고 했다. 언어는 다르지만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하나다. 챈들러는 무언가를 똑바로 마주하지 않으려고 평생 우회로를 돌고 있다.

그리고 네 전통은 출구마저 비슷하게 가리킨다. 피하지 말고 한 번 멈춰 서서 그것을 보라고. 매일, 조금씩, 도망치지 말고. 깨달음이든 회복이든, 그 문은 ‘이제 됐다’고 선언하는 순간이 아니라 매일 다시 닦는 자리에서만 열린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여기서 비켜선다. 융이다.

융은 동양의 수행법을 잘 알았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서양인이 그 방법을 문자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한심스러운 모방이자 비극이라고 단호하게 경계했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심리의 토대가 다르니, 매일 호흡을 고르고 마음을 한 점에 모으는 그 길을 서양인이 흉내 내면 오히려 정신이 분열되거나 부풀어 오른다고 봤다. 대신 그는 자기 식의 길을 냈다. 환상이 일어나게 그저 내버려두는 것. 무위에 의한 행위.

여기서 균열이 생긴다. 다른 세 렌즈가 ‘매일 닦으라’ 쪽으로 모일 때, 융만은 ‘매일 닦는 그 방식 자체가 너에겐 위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인물을 보면서도 네 전통이 끝내 한목소리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어쩌면 그게 정직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네 개의 렌즈로 본다고 해서, 그 사람이 깔끔한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는 않는다. 챈들러는 끝내 한 렌즈로 환원되지 않는다.

다시, 자정의 거실

화면 속 챈들러는 여전히 농담을 한다. 친구가 진지해지면 한 줄로 받아치고, 사람들은 웃고, 깊은 순간은 또 한 번 비껴간다. 그는 모른다. 자기가 무엇을 피하고 있는지, 자기 가면 뒤에 누가 있는지.

나는 맥주를 마저 비우고 텔레비전을 끈다. 사실 그를 분석하는 내내, 나는 그가 남 같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진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으면 슬쩍 농담으로 분위기를 푸는 나를, 나는 안다. 누구나 자기만의 농담하는 남자를 안에 하나씩 데리고 산다.

네 개의 렌즈로 본다고 그 남자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거기 있다는 걸 알게 될 뿐이다. 어쩌면 그거면 충분한지도 모른다. 불을 끄기 전에, 나는 오늘 내가 던진 농담 몇 개를 가만히 헤아려 본다.

— 최장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