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식탁이 완벽했다. 접시의 간격도, 냅킨이 접힌 각도도, 잔에 담긴 물의 높이까지 자로 잰 듯했다. 보통 잘 차린 상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데, 그 식탁은 어쩐지 나를 긴장시켰다. 포크 하나 비뚤게 놓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음식은 분명 맛있었는데, 나는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고 돌아왔다.
집에 와 앉아 있는데 한 여자가 떠올랐다. 늘 앞치마를 두르고 친구들을 먹이고, 누가 자기 집 물건을 제자리에 안 두면 못 견디고, 게임이든 요리든 한번 붙으면 기어이 이겨야 직성이 풀리던 여자. 모니카 겔러. 여섯 친구 중 가장 야무지고, 가장 잘 챙기고, 가장 빈틈없는 사람.
처음엔 그저 깔끔한 성격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녀를 오래 보면 그 완벽함이 어딘가 필사적이라는 게 보인다. 즐거워서 정돈하는 게 아니라, 정돈하지 않으면 못 견뎌서 정돈한다. 완벽한 식탁 앞에서 내가 느낀 그 긴장을, 어쩌면 모니카는 평생 자기 안에 품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저 빈틈없음은 대체 무엇을 막고 있는 걸까.
지운 몸
프로이트라면 먼저 그녀의 과거를 물었을 것이다.
모니카에게는 지우고 싶은 자기가 있다. 뚱뚱했던 시절. 드라마는 종종 그 시절의 모니카를 농담처럼 비추지만, 본인에게 그건 농담이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놀림받던 몸, 무가치하다고 느꼈던 자아. 지금의 날렵하고 완벽한 모니카는 그 몸을 완전히 부정한 자리 위에 서 있다.
프로이트는 질서벽과 청결, 인색과 고집이 한 묶음으로 움직이는 성격을 항문기 성격이라 불렀다. 어린 시절 무언가를 참고 통제하며 얻던 쾌감이, 수치와 혐오라는 둑에 막혀 다른 모습으로 솟아난 것. 깔끔함에 대한 집착, 통제에 대한 욕구가 거기서 나온다. 그런데 그가 더 날카롭게 본 건 그다음이다. 강박적인 청결과 완벽은 종종 반동형성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내 안의 무언가를 정반대 극단으로 덮어 누르는 방어. 그는 한 환자가 억눌린 분노와 자기처벌을 ‘살을 빼야 한다’는 강박으로 표출한 사례를 적기도 했다.
모니카의 완벽주의를 이 위에 포개면 그림이 또렷해진다. 그녀가 그토록 닦고 정리하고 통제하는 건, 단지 깔끔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뚱뚱하고 사랑받지 못했던 자기를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그 반대편 극단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완벽한 몸, 완벽한 집, 완벽한 상차림은 부정된 과거를 덮는 두꺼운 칠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라면 한마디 덧붙였을 것이다. 그 완벽주의의 더 깊은 곳에는 부모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는 결핍이 있다고. 잃어버린 인정을 되찾기 위해, 완벽하게 해내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생긴다고 믿는 자아가 거기 있다.
이 대목에서 오빠 로스가 겹친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남매인데, 둘은 정반대 갑옷을 골랐다. 로스는 지성과 학위로, 모니카는 완벽한 수행으로. 부모가 오빠를 더 아낀다는 무의식의 상처가 둘 모두의 연료인데, 한쪽은 머리로 인정을 구하고 한쪽은 손끝으로 인정을 구했다. 같은 결핍, 다른 갑옷이다.
벗을 수 없는 가면
융이라면 그 완벽한 모니카를 페르소나라 불렀을 것이다.
“완벽한 호스트, 완벽한 친구, 완벽한 요리사.” 모니카가 세상에 내건 얼굴이다. 문제는 그녀가 이 가면과 너무 깊이 하나가 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융은 지나치게 훌륭한 페르소나를 쌓은 사람은 그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공적으로 강하고 완벽한 사람일수록 사적으로는 과민하고, 짜증이 많고, 통제가 무너지면 어린아이처럼 휘청인다고. 완벽한 가면에 자아를 다 내주면, 정작 진짜 자기는 무의식 속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모니카가 딱 그렇다. 평소엔 누구보다 야무지게 모든 걸 장악하는데, 통제를 잃을 것 같은 순간이면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경쟁에서 지는 걸 못 견디고, 계획이 틀어지면 무너지고, 누가 자기 영역을 흩뜨리면 발작적으로 반응한다. 융은 이런 걸 두고 에난티오드로미아, 대극으로의 반전이라 했다. 의식이 완벽과 통제 한쪽으로만 너무 치우치면, 억눌린 반대쪽이 지하에서 폭발적인 힘을 모았다가 어느 순간 통제를 뚫고 터져 나온다. 모니카의 그 갑작스러운 통제 상실의 공포는, 평생 억눌러 온 ‘엉망이고 불완전한 자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그런데 융은 여기서 의외의 출구를 본다. 아니무스, 곧 그녀 안의 남성상이 어디에 가서 안착하느냐다. 모니카가 고른 남자는 강하고 완벽한 남성이 아니다. 불안하고 농담 뒤에 숨고 어딘가 미덥지 못한, 그러나 헌신적인 챈들러다. 융은 말했다. 겉으로 내건 태도에 빠져 있는 것은 반드시 안쪽 태도에서 발견된다고. 모니카의 페르소나가 완벽과 강함이라면, 그녀의 무의식이 끌리는 건 필연적으로 그 반대편, 불완전함과 연약함이다. 그리고 진짜 인간관계는 완벽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위에 선다고 그는 적었다. 약하고, 서툴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 위에.
그러니 모니카가 불완전한 챈들러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다. 그건 그녀가 평생 혐오하고 억눌러 온 ‘불완전한 자기’를, 챈들러라는 사람을 통해 바깥에서 처음으로 껴안아 보는 일이다. 완벽한 남자를 골랐다면 그녀의 완벽주의는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불완전한 남자를 고름으로써, 그녀는 비로소 불완전한 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힘으로 메우는 사람
여기서부터는 한의사의 눈이다. 모니카는 소양인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의 친구 레이철과 같은 본체.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밖으로 뻗는 기운이 강한 사람이다. 추진력이 좋고, 시작이 빠르고, 에너지를 바깥으로 쏜다. 그런데 같은 소양인이라도 레이철과 모니카는 그 에너지를 정반대로 쓴다. 레이철은 밖으로 쏘아 버린다. 화가 나면 그 자리에서 터뜨리고, 욕망이 일면 즉각 움직인다. 모니카는 그 에너지를 안으로 조인다. 같은 추진력을, 한 명은 발산으로 한 명은 통제로 쓴다.
흥미로운 건 모니카가 매달리는 그 정리·축적·완벽의 기질이다. 사상심학의 기능 위계로 보면, 소양인은 소양기를 으뜸으로, 태양기를 둘째로, 태음기를 셋째로, 소음기를 가장 약한 자리로 타고난다. 그런데 모니카를 모니카답게 만드는 정돈하고 쌓고 빈틈없이 갈무리하는 그 능력은 태음기의 몫이다. 그녀에게 태음기는 셋째 기능, 곧 자연스럽게 잘 쓰는 자리가 아니라 약해서 의식적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자리다.
이게 핵심이다. 잘 쌓는 사람은 힘들이지 않고 쌓는다. 그런데 모니카는 힘들여 쌓는다. 그녀의 정리와 완벽이 그렇게 날이 서 있고 강박적인 건, 타고나길 약한 기능을 악착같이 끌어올려 쓰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정돈이 아니라 힘으로 메우는 정돈이다. 게다가 그녀의 가장 약한 자리인 소음기는 차분히 안을 다스리고 불안을 가라앉히는 기능이다. 하필 그 자리가 가장 비어 있으니, 통제가 흔들릴 때 모니카는 누구보다 크게 무너진다. 약한 기능을 힘으로 메우고, 가장 약한 자리에서 가장 크게 흔들리는 사람. 그게 사상심학이 보는 모니카다.

쥔 손
마지막으로, 불교의 자리에서 보면 모니카의 완벽주의는 다른 이름을 얻는다. 집착이다.
부처는 탐애(貪愛)를 그물이라 불렀다. 좋아하고 붙들고 내 것으로 쥐려는 마음이 그대로 사람을 옭아매는 그물이 되고, 아교가 되고, 빠져나갈 문을 막는 문지기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그물의 뿌리에 ‘나’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고 했다. 내 집, 내 부엌, 내 방식, 내 계획 — 모니카의 세계는 온통 ‘내 것’으로 각이 잡혀 있다. 그 각을 지키려는 마음이 그녀를 부지런하게도 만들지만, 동시에 그녀를 한순간도 편히 쉬지 못하게 한다.
부처는 괴로움에는 원인이 있다고 했다. 괴로움이 있고, 그 괴로움을 일으키는 갈애가 있고, 그것이 멎는 자리가 있고, 거기 이르는 길이 있다고. 모니카의 괴로움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정돈되어 있지 않다는 데서 온다. 그런데 세상은 본래 내 뜻대로 가만히 있어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흐트러지고 변한다. 완벽하게 쥐려 할수록, 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힌다. 쥔 손이 곧 그녀의 그물이다.
그렇다면 풀려나는 길은 손을 펴는 것이다. 그런데 모니카는 손을 못 편다. 평생 쥐는 것으로 자신을 지켜 왔기 때문이다. 손을 펴면 그 무가치했던 옛 자기가 돌아올 것 같으니까. 다만 딱 한 군데, 그녀가 손을 조금 펴는 자리가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자기 뜻대로 정돈되지 않는 사람, 챈들러 앞에서다.
완벽해지려던 이유
네 렌즈를 나란히 놓으면 한 점으로 모인다.
프로이트는 그녀의 완벽을 부정된 과거를 덮는 칠이라 했다. 융은 진짜 자기를 밀어내고 뒤집어쓴 가면이라 했다. 사상심학은 약한 기능을 힘으로 메우는 안간힘이라 했다. 불교는 놓지 못하고 쥔 손, 곧 집착이라 했다. 네 번 다 같은 말이다. 모니카의 완벽은 능력의 표현이 아니라 방어다. 완벽해야 사랑받는다고 믿는 사람이, 사랑을 잃지 않으려고 점점 더 세게 쥔 손이다.
그래서 챈들러와의 결혼이 그녀의 이야기에서 그렇게 중요하다. 그건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네 렌즈가 가리키던 출구다. 완벽한 남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남자를, 통제되는 대상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을 곁에 들이는 일. 프로이트의 말로는 완벽해야 사랑받는다는 믿음에 처음 생긴 균열이고, 융의 말로는 억눌린 불완전한 자기를 바깥에서 껴안는 보상이며, 불교의 말로는 한 사람 앞에서 겨우 손을 펴 보는 일이다.
다만 깔끔한 결말로 적고 싶지는 않다. 모니카는 챈들러를 만나고도 여전히 정리하고, 경쟁하고, 통제한다. 완벽주의가 사랑으로 깨끗이 나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정확히는, 완벽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걸 단 한 사람 앞에서만 겨우 허락하게 된 것이다. 갑옷을 벗은 게 아니라, 갑옷 안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들인 것. 그 정도가 모니카가 평생에 걸쳐 도달한, 작지만 진짜인 변화다.
다시, 그 식탁
완벽했던 그 식탁이 다시 떠오른다. 자로 잰 듯한 간격, 비뚤어지면 안 될 것 같던 포크. 그날 나를 긴장시킨 건 그 완벽함이 아니라, 그 완벽함 뒤에서 누군가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져서였는지도 모른다.
진료실에서도 그런 사람을 만난다. 모든 걸 빈틈없이 해내야 직성이 풀리고, 조금만 흐트러져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예전엔 그저 꼼꼼한 성격이라 여겼다. 지금은 그 완벽함 아래에 무엇이 눌려 있는지를 먼저 생각한다. 대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거기 있다. 완벽해지라고 더 다그치는 건 그래서 답이 못 된다. 그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 줄 단 한 사람이다.
모니카에게 그건 챈들러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한 사람이 있기를, 완벽한 식탁을 떠올릴 때마다 가만히 바라게 된다.
— 최장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