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누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음정은 군데군데 어긋났고 가사도 즉석에서 지어내는 듯 앞뒤가 안 맞았는데, 정작 부르는 사람은 더없이 충만해 보였다. 신호가 바뀌어 그 사람은 사라졌지만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저렇게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견디고 있길래 저렇게 부르는 걸까.

그러다 한 여자가 떠올랐다. 기타를 들고 카페 한구석에서 고양이 냄새에 관한 노래를 부르던 여자. 피비 부페. 친구 여섯 중에 가장 엉뚱하고, 가장 영적이고, 가장 종잡을 수 없는 사람. 전생을 이야기하고 죽은 어머니의 영혼과 대화하고 우주의 뜻을 읽는다고 말하는 여자.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웃긴 캐릭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의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웃음이 잘 안 나온다. 어머니는 그녀가 어릴 때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녀는 한동안 거리에서 살았고, 친아버지는 떠났고, 쌍둥이 자매와도 사이가 어그러졌다. 보통 이런 인생은 사람을 무너뜨린다. 그런데 피비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게 오래 걸렸다. 저 충만한 노래가 어떻게 가능한가.

없는 사람을 곁에 두는 법

프로이트라면 이 여자를 오래 들여다봤을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사람의 자아가 무엇을 하는지, 그는 집요하게 적었다. 사랑하던 사람이 죽거나 자기를 버렸을 때, 그 사실이 도저히 감당이 안 되면 자아는 현실로부터 등을 돌린다. 현실을 검증하는 기능을 잠시 꺼버리고, 억눌렸던 소망을 더 나은 현실인 양 받아들인다. 그렇게 잃어버린 대상이 여전히 곁에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낸다. 어머니는 죽은 게 아니라 영혼이 되어 가까이 있고, 지금의 삶 이전에 다른 생이 있었고, 모든 일에는 우주의 뜻이 있다 — 피비가 사는 세계가 정확히 그런 세계다.

흥미로운 건 프로이트가 이걸 단순히 병이라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환상으로의 도피를 두고 ‘회복을 위한 노력(attempt at recovery)‘이라고 했다. 파국을 겪은 자아가 어떻게든 세상과 관계를 다시 맺어 보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짓는 이야기. 그러니까 피비의 영성은 그녀가 미쳐서 생긴 게 아니라, 미치지 않으려고 지은 것이다.

상실을 처리하는 길은 보통 둘이라고 프로이트는 봤다. 하나는 애도다. 떠난 사람이 정말 없다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마음을 거두어들인 뒤, 끝내 자유로워지는 길. 다른 하나는 멜랑콜리아다. 떠난 사람을 놓지 못해 그 그림자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를 향했어야 할 원망을 자기에게 돌려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길. “대상의 그림자가 자아 위로 드리워졌다"고 그는 적었다. 어머니를 잃은 많은 사람이 이 두 번째 길에서 가라앉는다.

피비는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다. 그녀는 세 번째 길을 냈다. 잃은 것을 놓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 무게에 깔리지도 않고, 잃은 것을 이야기로 바꿔 곁에 두는 길. 어머니는 영혼이 되어 남고, 슬픔은 노래가 되어 나온다. 그래서 그녀는 가라앉지 않는다. 다만 프로이트라면 여기서 목소리를 낮췄을 것이다. 그렇게 지은 세계는 시간이 지나면 자아에 고착되고,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마음이 둘로 갈라진다고. 한 발은 현실에, 한 발은 영혼의 세계에. 피비가 끝내 어딘가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불장난

같은 영성을 융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봤을 것이다.

융은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이미지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갈랐다. 하나는 수동적 환상이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흘러가는, 자기 바람의 표면에 머무는 덧없는 공상. 다른 하나는 능동적 상상이다. 영혼이든 죽은 자든 신이든, 내면에 떠오른 그 형상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되 그것에 잡아먹히지는 않는 것. 형상을 살아 있게 두면서도 자기는 깨어 있는, 위태로운 균형. 융에게 이 균형은 치유의 길이었다.

외상을 영적이고 신화적인 의미로 바꾸는 일에 대해 융은 그 힘을 높이 샀다. 내 고통이 나 혼자만의 비참이 아니라 더 큰 이야기의 한 자락이 되면, 사람은 고립에서 풀려난다. 합리적인 머리로는 끝내 화해할 수 없는 영혼의 상처가, 그런 상징의 옷을 입을 때 비로소 위안을 얻는다고 그는 봤다. 피비가 자기 불행을 전생과 운명과 우주의 뜻으로 엮을 때, 그녀는 정확히 그 일을 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큰 이야기 속을 지나는 영혼.

그런데 융은 곧바로 경고를 붙였다. 이건 불장난이라고. 사회적 자아가 단단히 자리 잡지 못한 사람이 그 상징의 힘에 압도당하면, 숨어 있던 정신증이 터져 나온다. 영혼의 세계에 매료되어 현실의 닻을 놓아 버리면, 무의식의 홍수에 그대로 휩쓸린다. 피비가 가진 재료를 생각하면 — 어머니의 자살, 거리에서 보낸 시절, 누구에게도 안전하게 묶이지 못한 유년 — 그녀는 그 불에 가장 타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안 탔다. 영혼을 믿고 전생을 믿으면서도 미치지 않았다. 그 믿음을 품은 채로 그녀는 마사지사로 꼬박꼬박 일을 했고, 매일 같은 카페에 나와 친구들 사이에 앉았고, 동생을 위해 대리모로 아이를 품는 현실의 무게까지 감당했다. 영혼의 세계에 한 발을 담그고도 나머지 한 발은 끝내 땅에서 떼지 않은 것이다. 6인 중 가장 두꺼운 그림자를 — 거리 시절의 거친 면, 버려진 데서 온 분노를 — 안고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자아의 힘을 말해 준다. 다만 융의 눈으로 보면 그게 도착점은 아니다. 능동적 상상은 그 형상을 끝내 ‘나와는 다른 것’으로 마주 보고, 그 의미를 자기 것으로 소화한 뒤 졸업하는 데까지 간다. 피비는 졸업하지 않는다. 그 믿음 안에 그냥 산다. 미치지도, 벗어나지도 않는 가느다란 선 위에서, 평생.

밖으로 짓는 사람

여기서부터는 한의사의 버릇이 나온다. 나는 사람을 체질로 먼저 읽는다. 피비는 태양인이다. 친구 여섯 중 유일한.

태양인은 폐대간소(肺大肝小)다. 이제마의 말로 하면 애성(哀性)이 멀리 흩어지는 사람이다. 슬픔이라기보다 세상 전체로 번지는 넓은 연민에 가깝다. 길에서 처음 본 사람과도 곧장 마음을 트고, 택시 기사든 안마사든 금세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 교우(交遇), 낯선 것과 즉각 이어지는 힘이다. 그런데 같은 원리의 그늘이 있다. 간소(肝小)라 축적과 정착이 약하다. 한자리에 잘 고이지 못한다.

그래서 피비는 6인 중 유일하게 어디에도 얹혀 살지 않는다. 모니카와 레이철이 한 집, 챈들러와 조이가 한 집, 다들 둘씩 묶여 사는데 그녀만 혼자다. 로스도 따로 살긴 하지만 결이 다르다. 로스의 따로-삶은 끼고 싶은데 못 낀 사람의 겉돎이고, 피비의 따로-삶은 낄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의 겉돎이다. 같은 ‘따로’인데 방향이 정반대다. 이제마는 태양인을 두고 교우에는 능해도 당여(黨與)에는 약하다고 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공평하나 가까운 무리를 오래 건사하는 데는 서툴다는 뜻이다. 피비는 그 약점이 거주 구조에 그대로 박힌 사람이다.

그러면 그 노래와 작화는 어디서 오는가. 태양인은 자기 본기 다음으로 소양기를 타고난다. 사상심학에서 소양기는 감정의 표현과 사람 사이의 어울림을 맡는 자리, 밖으로 뻗어 즉석에서 형태를 만들어 내는 힘이다. 피비가 슬픔을 노래로 짓고 상처를 이야기로 엮어 내는 그 손이 바로 소양기다. 태양기가 멀리 퍼지는 연민으로 의미를 길어 올리면, 소양기가 그걸 받아 노래와 서사로 빚어 밖으로 내보낸다. 의미를 길어 올리는 깊이와 그걸 형태로 뽑아내는 솜씨가 한 사람 안에 같이 있는 셈이다.

같은 집안 태음인인 로스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로스는 태음 본기에 소음기를 얹어, 자기 서사를 안으로 끝없이 곱씹는다. 곱씹은 것은 고이고, 고인 것은 끝내 곪는다(物化). 피비는 태양 본기에 소양기를 얹어, 자기 서사를 밖으로 빚어 흩는다. 노래는 한 번 부르고 흘려보내면 그만이다. 그녀가 한 곡을 완성해 붙들고 있는 법이 없다는 것도 같은 이치다. 즉석에서 짓고, 부르고, 다음엔 또 다른 노래로 넘어간다. 간소(肝小)라 한자리에 고이지 못하는 그 성정이, 하필 끝없이 새로 짓는 창작의 동력으로 뒤집혀 나온 셈이다. 그래서 그녀는 곪지 않는다. 같은 상처라도 안에 담아 두면 병이 되고 밖으로 지어 내보내면 노래가 된다. 다만 이제마는 태양인이 제 길을 잘 가려면 나아가되 또한 고요해야 한다고(進之而又靜之) 했다. 피비에게 그 고요함은 아주 늦게, 마이크라는 사람과 함께 온다. 평생 처음으로 한곳에 머물러 보려는 시도였다.

약이 곧 증상이라는 것

세 렌즈를 나란히 놓고 보면 묘하게 한 점으로 모인다.

프로이트는 피비의 영성을 무너지지 않으려는 회복의 노력이라 부르면서, 동시에 그것이 현실과 환상 사이에 그녀를 갈라 세운다고 했다. 융은 그것을 고립을 끊어 주는 강력한 치유라 인정하면서, 동시에 끝내 졸업하지 못하는 불장난이라 했다. 사상심학은 그 발산이 그녀를 곪지 않게 한다고 보면서, 동시에 그녀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세 번 다 같은 말이다. 그녀를 살린 바로 그 힘이, 그녀를 끝까지 바깥에 두었다.

이야기가 약이었다. 그리고 같은 이야기가 증상이었다. 둘은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떼어내면 그녀가 죽으니까. 어머니가 영혼으로 남아 있다는 믿음을 빼앗으면, 남는 건 자살로 어머니를 잃은 아이 하나뿐이다. 전생과 우주의 뜻을 지우면, 남는 건 거리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했던 시절뿐이다. 그 이야기들이 없었으면 피비는 없었다.

앞서 조이를 두고 나는 닦지 않고도 거기 있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피비는 그 반대편에 있다. 닦아서 도달할 수도 없고 타고나지도 못한 자리를, 그녀는 이야기를 지어 메웠다. 정공법이 아니다. 누구에게 권할 길도 아니다. 그런데 그 우회로가 실제로 그녀를 살렸다. 정답이 아닌 방법으로 살아남은 사람을, 정답이 아니라는 이유로 깎아내릴 수는 없다. 약과 증상이 한 몸인 사람 앞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둘을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그 위태로운 동거를 다치지 않게 지켜보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로 버틴 여자

다시, 그 노래

길에서 들은 그 흥얼거림이 다시 떠오른다. 음정도 안 맞고 가사도 엉성한 그 노래가, 어쩌면 누군가를 살리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의사로 사는 나는 고치는 일을 한다. 그런데 피비 같은 사람 앞에서는 고칠 것이 없다. 그 병이 곧 그녀를 살린 약이기 때문이다. 진료실에서도 가끔 그런 환자를 만난다. 자기 병을 두고 의학과는 전혀 다른 자기만의 이야기를 — 운명이라거나, 조상 탓이라거나, 다 뜻이 있다거나 — 품고 오는 사람들. 예전엔 그 이야기를 바로잡아 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망설인다.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을 여기까지 데려온 약이었다면, 함부로 빼앗아선 안 된다는 걸, 나는 저 엉뚱한 여자에게서 배운다.

그러니 누가 음정 안 맞는 노래를 부르며 지나가거든, 웃되 끝까지 웃지는 말 일이다. 그 노래가 그 사람의 지붕일 수도 있으니까.

— 최장혁 —